주간동아 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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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 통쾌 그대 이름은 여성이라네

허은희 감독의 ‘심장이 뛰네’

  • 정지욱 영화평론가, 한일문화연구소 학예연구관 nadesiko@unitel.co.kr

    입력2011-08-08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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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쾌 통쾌 그대 이름은 여성이라네
    쿵쾅쿵쾅, 콩닥콩닥.

    태아는 심장 박동 소리를 통해 자기 존재를 외부에 알리고, 그 소리를 들으며 엄마 아빠는 환희의 순간을 맞이한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쉬지 않고 심장이 뛴다. 그리고 그 박동 소리가 멈추는 순간 세상과 이별을 고한다.

    어린 시절 체육시간에 숨 가쁘게 달린 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고, 학창 시절 사모하는 이의 뒷모습만 봐도 콩닥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사랑의 열병을 앓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왔던 우리는 요즘 자신의 심장 박동을 얼마나 느끼며 살까. 나의 심장은 분명히 뛰고 있을 터인데 그 심장 박동 소리에 귀 기울여본 지 오래다. 그렇게 멈춘 듯 잊고 지냈던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허은희 감독의 영화 ‘심장이 뛰네’가 개봉했다.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가 두 손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심장이다.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채 심장을 먹던 그가 스크린을 쳐다보다 관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씽긋 미소를 지어 보인다.

    흠칫 놀란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옆에 앉았던 후배기자가 슬쩍 “이 영화 공폰가? 선배 이거 스릴러예요?”라고 물었다. 영화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으로 시작해 처음부터 관객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공포 영화도 스릴러 영화도 아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서른다섯 살’이라 말하는 서른일곱 살의 영문학 교수 유주리(유동숙 분)는 새로 신설한 ‘영미문학과 페니미즘 영화’ 과목을 맡아 강의한다. 교수회의에서 간식 먹고 난 쓰레기 청소까지 도맡아야 하는 막내교수다. 회의를 마치고 학과장이 문득 주리에게 “선생님은 요즘 무엇으로 사나?”라고 묻는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든다.

    신설 과목에 포르노를 응용해보겠다는 심사에 늦은 밤 노트북에 이어폰을 꽂은 채 늘어진 가슴의 중년 여인이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야동’을 보는 주리. 이따금 자위행위를 하기도 하지만 그의 주위엔 그다지 섹스를 하고 싶은 남자가 없다. 우체국 택배 배달원에게, 과일가게 주인에게, 심지어 남학생의 집적거림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표정 없는 그의 모습은 한없이 ‘찌질’하다.

    허 감독은 “심한 우울증을 앓고 불면증에 시달리던 어느 날 밤, 출렁이는 뱃살과 늘어진 가슴을 지닌 오십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한 중년 여자가 가면을 쓴 채 어린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야동’을 보고 충격과 함께 묘한 욕정을 느껴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감독 스스로 느꼈던 욕망과 충동, 아니 그 나이대 여성이 느낄 만한 욕망을 이 영화에 담은 것이다.

    주리가 사과상자에 담겨 배달된 복숭아 때문에 재채기하고 온몸을 긁어대며 찾아간 곳은 야동을 제작하는 친구 차명숙(변지연 분)의 사무실. 10년 만에 명숙을 찾아간 그의 용건은 “포르노 배우가 돼 남자를 자주 바꿔가며 섹스를 해보고 싶다”였다. 명숙의 만류에도 주리는 다이어트로 몸매를 만들어가며 포르노 배우가 되기를 결심한다.

    주리와 대학 동기지만 포르노 영화 제작자의 길을 걷는 명숙은 말끝마다 욕지거리를 달고 사는 여장부다. 명숙은 주리의 도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관객에게 미소를 선사하는 감초 같은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그리고 또 한 명. 주리가 찾아가는 병원의 늙은 의사도 마찬가지다. 그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의사는 늙은 나이에도 빨간색 바지를 즐겨 입는다.

    유쾌 통쾌 그대 이름은 여성이라네
    결국 포르노 배우로 출연하는 주리는 가슴에 상처를 안은 별(원태희 분)을 만나고, 그에게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침내 멈춘 것 같았던 그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영화에는 여러 은유와 상징이 등장한다.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은유하는 복숭아, 쳐다만 봐도 신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붉디붉은 석류, 주리가 입은 붉은색 드레스, 그리고 첫 장면에 등장하는 주리의 두 손에 들린 붉은 심장까지. 어쩌면 처참하리만큼 아픈 그의 욕망과 꿈, 그리고 정체성을 슬쩍슬쩍 드러낸다.

    허 감독은 1999년부터 서른 편의 단편영화와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장편영화 프로듀싱, 연극과 뮤지컬 연출에 참여했고, 현재는 부산 동의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가 2009년 부산영상위원회로부터 100% 제작 지원을 받아 연출한 장편 극영화가 바로 ‘심장이 뛰네’다. 그가 재직 중인 학교에서 촬영하는 등 영화 후반 작업까지 완벽하게 부산에서 한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부산표 영화’다.

    미국 유학시절 포르노 제작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과 에피소드를 80% 이상 담아내 영화의 많은 부분이 포르노 영화 제작을 위한 준비와 촬영 모습으로 이뤄졌다.

    포스터와 스틸사진만 보면 에로 영화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파격적인 소재에 대한 리얼한 묘사 속에 여성의 성과 심리를 재치 있게 풀어냈다. 이 작품은 주변의 여리고 힘없어 보이는 여성들이 사실은 가장 용기 있고 유쾌한 존재라는 사실을 여성의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알려준다.

    이 영화는 2010년 필라델피아독립영화제, 로마국제영화제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초청받았다. ‘심사위원 특별 언급상’을 받은 LA국제영화제에서는 “슬프지만 코믹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보기 드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 얼마 전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전석이 매진되는 등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안타까운 사실은 영화에선 주리의 심장이 다시금 힘차게 뛰지만, 주리를 연기한 배우 유동숙의 심장은 멈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로마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뒤 귀국한 그는 신종플루로 쓰러져 입원한 지 9일 만에 심장이 멈추고 말았다. 뜨거운 열정으로 아름다운 연기를 펼쳤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는 행운을 관객에게 선사하고 그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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