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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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사상의 꽃 ‘퇴계와 남명’

조선조 관통한 학문적 라이벌 탄신 5백주년… 仁義 - 敬義 지향점 달라도 ‘영원한 師表’

  • < 이성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입력2005-03-21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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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들지 않는 사상의 꽃 ‘퇴계와 남명’
    예로부터 영남은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했다. 조선시대 사림(士林) 오현(五賢) 중에서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4명이 영남 출신이고, 이 밖에도 많은 학자들이 배출돼 우리의 사상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曹植) 두 사람은 당대의 사표(師表)로서 늘 병칭됐으며 각기 퇴계학파(退溪學派)와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종사(宗師)로서 후학들로부터 극도의 추앙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퇴계와 남명은 1501년 동갑내기로 올해는 이들의 탄신 500년이 되는 해다. 퇴계는 경북 예안 청량산 자락의 토계리(兎溪里)에서 출생했고, 남명은 경남 지리산 기슭의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에서 태어났다. 둘 다 영남 출신이며 나이도 동갑이었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두고 ‘동도동경’(同道同庚)의 인연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학자로서의 지향점이나 선비로서의 출처관(出處觀)에서 너무나 다른 점이 많았다. 퇴계가 인의(仁義)를 숭상한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였다면, 남명은 경의(敬義)를 중시한 기상의 소유자였다. 도산서원의 퇴계사당이 상덕사(尙德祠)로 명명되고, 덕천서원의 동서재에 걸린 경재(敬齋)-의재(義齋)라는 편액은 바로 이들 두 사람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매화(梅花)를 사랑했던 퇴계의 심성(心性)과 시퍼렇게 날이 선 패도(佩刀)에 강한 애착을 보였던 남명의 성정(性情)은 우연한 대비가 아니다.

    퇴계가 학자로서 그리고 관료로서의 삶을 병행했다면, 남명은 초야에서 일생을 보낸 전형적인 처사형 선비였다. 퇴계가 마지못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라는 고위직에 오를 때 남명은 지리산의 암혈에서 고결한 선비의 풍모를 지키려 노력했다. 두 사람의 삶의 지향은 이렇게 달랐다.

    시들지 않는 사상의 꽃 ‘퇴계와 남명’
    그리고 학문 본연에 있어서도 퇴계가 주자학의 이론적 심화에 일생을 바친 반면, 남명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에는 저술이 불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이론적 탐구보다는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열중했고, 윤리와 강상(綱常·삼강과 오상,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그리고 명분을 목숨처럼 중시했다.



    여기서 남명의 명분주의를 말해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남명에게는 애첩(愛妾)이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는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나 남명의 임종시 그 애첩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간청했으나 남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남자는 여자의 손에서 죽지 않고,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는 유교 경전 ‘예기’(禮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여기에 비해 퇴계는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일지라도 중도에 남의 말을 끊는 법이 없었고, 비록 신분이 하찮은 가문의 자제일지라도 배움을 청하면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은 지극히 순후하면서도 논리가 정연했고, 행검(行檢)에 독실하여 스승으로서의 위엄이 충만했다. 이러한 포용력을 바탕으로 도산 문하에는 유수한 인재들이 운집하게 됐다. 제자들은 그를 두고 “선생의 학문은 평이명백(平易明白)하고, 선생의 도(道)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와 남명은 16세기 조선의 사상계를 대표하는 석학이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었다. 퇴계가 도산에 삼간 초당을 짓자 도산서당에는 배움을 청하는 선비들의 발길이 그칠 새가 없었다. 이 점에서 도산서당은 퇴계학의 본산이며 퇴계학파 형성의 근원이 됐다.

    남명은 1560년에 수십년 간 독서하고 가르치던 김해의 산해정(山海亭)을 떠나 지리산 아래 덕산의 산천재(山天齋)에 거처를 정했다. 이를 계기로 진주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는 매우 고조됐다. 산해정에서 산천재로 이어지는 남명의 행보는 남명학파 중심지의 이동인 동시에 학파의 거대한 확장 과정이었다.

    성주(星州)를 기준으로 하는 상도(上道)의 준재들은 퇴계 문하로 흡수되어 갔고, 하도(下道)의 영재들은 남명 문하로 규합되어 갔다. 물론 정구(鄭逑) 정탁(鄭琢) 김우옹(金宇 ) 등과 같이 두 문하를 동시에 출입한 문인들도 있었지만,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형성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시들지 않는 사상의 꽃 ‘퇴계와 남명’
    퇴계와 남명도 학자요 지성인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었다. 이들에게도 상대를 의식하는 경쟁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두 사람은 동도동경의 인연과 양대 학파의 종사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생전에 단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1569년 서울 장의동(壯義洞)에서 열린 박태수(朴台壽)의 회갑연에 두 사람 모두 공식 초청돼 수연첩(壽宴帖)에 이름이 올라 있으므로 이때 혹시 상면했는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경쟁심은 각기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종사로서 이미지가 강화되던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양인은 평소 서로를 북두성에 비기며 예우와 존경의 마음을 다하였고, 편지를 통해 ‘천리신교’(千里神交)의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태도와 삶의 방식이 달랐다. 이것이 두 사람의 자존심 또는 라이벌 의식과 접합되면서 서로에 대한 비난과 풍자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남명의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특립독행’(特立獨行·혼자 자립하여 고고히 실천함)일 것이다. 퇴계는 바로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고 세상을 외면하는 남명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고, 학문적으로도 찬성하지 않는 점이 많았다. 이에 그는 남명을 두고,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老莊)에 물든 병통이 있다”는 말로써 그의 삶의 자세와 학문을 은근히 비판했다. 이 말을 들은 남명 역시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는 말로써 퇴계를 비꼬았다.

    이런 와중에 두 사람의 불화를 부추긴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정(李楨)이라는 사람이었다. 사천 사람인 이정은 남명의 지우였으나 이른바 ‘음부사건’(淫婦事件)을 통해 남명과 결별하고 퇴계 문하로 들어간 사람이다. 음부사건이란 진주의 진사 하종악(河宗岳)의 후처가 음행을 저지른 사건으로서 윤리와 강상을 중시했던 남명에게는 결코 묵인될 수 없는 ‘강상(綱常)의 변(變)’이었다. 남명은 이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정에게 여러 차례 자문했다. 그러나 이정의 태도가 불분명할 뿐더러 여러 번 입장을 번복하자 남명은 특유의 강단이 발동하여 절교를 선언했다. 당황한 이정은 퇴계 문하에 나아가 문인을 자처하고, 퇴계 역시 이정을 두둔해 퇴계와 남명 사이의 불화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퇴계가 이언적(李彦迪)의 행장을 지으면서 그를 매우 추앙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앙금을 만들게 됐다. 남명은 평소 벼슬에 연연하는 이언적의 처신을 보고 그를 진정한 선비로 대하지 않았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퇴계는 그의 행장에서 선생으로 칭하면서 극도로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퇴계와 남명 사이에는 때로는 가시적이고 때로는 내재적인 불만이 잔존하고 있었지만, 심각한 상황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서로에 대한 불만을 가지면서도 자잘한 비난을 삼가며 거유(巨儒)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상당수의 인사들이 퇴계-남명 문하에 동시에 출입하게 된 것도 두 사람이 가지는 학문적 포용성과 유연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1570년 퇴계의 부음을 접한 남명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이 사람이 세상을 버렸다 하니, 나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오래지 않았구나!” 하는 말로써 자신의 말년을 예언하기까지 했다. 이런 예언은 어긋나지 않아 남명은 1년이 지난 1571년 만년의 강학처인 산천재에서 고종명함으로써 16세기의 사상계를 풍미했던 두 석학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됐다.

    퇴계와 남명은 같은 해에 태어나 한 해 차이를 두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지만 이들의 죽음이 학파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의 사후에 문인-제자들을 중심으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형성돼 스승의 학문을 계승-발전시키면서 이 시기의 사상계를 주도하게 됐다. 인조반정으로 남명학파가 분열되면서 영남학파는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재편됐지만, 원래 역사적 용어로서의 영남학파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통칭하는 말이었고, 그 종사는 바로 퇴계와 남명이었다.

    퇴계와 남명의 문인들은 한동안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하여 1585년 동서분당시에는 같은 동인으로 활동했다. 유성룡 김성일 우성전은 퇴계 문하를 대표하는 관료들이었고, 정인홍 김우옹 정탁 오건 등은 남명 문하를 대표하는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선조 때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사들 중에는 퇴계 문인들이 가장 많았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은 남명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퇴계 문하의 학술적 분위기가 고급 관료의 양산으로 나타나고, 남명 문하의 실천적 성향이 의병활동의 적극성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동서분당 이래 동인으로 활동하던 두 문인들은 1591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남북으로 갈라서게 됐다. 정쟁의 와중에서 남인-북인으로 갈라진 문인들은 각기 유성룡과 정인홍을 중심으로 치열한 대립을 벌이면서, 스승들의 문집(文集) 간행과 서원 건립을 통해 퇴계와 남명의 현양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시들지 않는 사상의 꽃 ‘퇴계와 남명’
    이러한 경쟁의식은 두 문하의 수제자격인 유성룡과 정인홍의 대립으로 심화됐고, 급기야 1610년 사림 오현의 문묘종사를 계기로 극도에 달하게 됐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사림 오현의 이름으로 문묘에 종사되고 남명이 여기서 제외되자,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의 허물을 비방한 이른바 ‘회퇴논척’(晦退論斥)을 단행하여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정인홍은 청금록에서 삭제됐지만, 대북 정권의 당국자로서 정치적 타격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정권이 몰락하고 정인홍이 처형되자 남명학파는 존립에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정인홍의 잔당’이라는 비난을 우려한 남명학파의 상당수 인사들은 정인홍과의 사제관계를 부정하고 정구(鄭逑)를 매개로 퇴계학파에 연원을 붙이는 현상이 속출했다. 후일 영남학파가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재편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진양하씨 창주파(滄洲派), 해주정씨 농포파(農圃派), 청주한씨 조은파(釣隱派), 창녕성씨 부사당파(浮査堂派)처럼 서인으로 전향한 계열도 적지 않았다. 이는 정치적으로 남인을 표방한 안동 지방의 퇴계학파와는 달리 진주지역에 남인과 노론이 병존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퇴계와 남명은 영남이라는 동일한 지역에서 활동했고, 그리고 16세기라는 동일한 시대를 살며 각기 도덕과 경의를 학문의 모토로 삼아 영남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 영남학파의 양대 준령이었다. 한 사람은 주자학의 이론적 심화를 추구했고, 한 사람은 지행합일에 바탕한 실천성을 중시했다.

    그들은 학문적 지향점이 서로 달랐지만, 본령에 충실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는 퇴계와 남명의 당대에는 규모와 비중이 대등했으며, 퇴계-남명 사이의 약간의 불화에도 상호간의 턱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사후 정쟁의 와중에서 문인들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게 됐고, 퇴계-남명에 대한 문인 상호간의 비방이 격화되면서 점차 화합할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됐다. 여기에 인조반정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생기면서 남명학파는 심하게 분열하여 현격히 위축됐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남명학파의 본거지인 진주 일대에는 17세기 후반 이래 남인-노론이 병존하며 갈등과 반목을 유발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남인이든 노론이든 남명 자신에 대한 극도의 추앙과 존경심은 시대를 불문하고 그대로 유지됐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물론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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