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와이드 릴리즈]
영화는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이며, 세 희생자와 절친했던 제임스 볼드윈(오른쪽 사진 속 선글라스 낀 남성)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더빙은 새뮤얼 잭슨). 우선 그는 자신이 어떻게 흑인으로 성장했는지부터 털어놓는다. 곧 흑인의 정체성 형성 문제인데, 흥미롭게도 여기에 동원되는 게 수많은 영화다.
볼드윈은 어릴 때 엄마와 함께 조앤 크로퍼드가 주연한 뮤지컬 영화 ‘댄스, 풀스, 댄스’(1931)를 보며 여주인공에게 반한 경험부터 말한다. ‘흑인’ 소년 볼드윈에게도 ‘백인’ 스타 크로퍼드의 외모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서부극 고전 ‘역마차’(1939)를 보며 주인공 존 웨인을 영웅시했고, 그와 맞섰던 ‘인디언’은 존 웨인처럼 적으로 봤다. 말하자면 볼드윈은 영화의 주인공, 곧 백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하지만 얼마 뒤 자신이 존 웨인이 아니라 총에 맞아 죽는 인디언이라 여길 때, 흑인 소년의 정체성에 큰 변화가 왔다. 사춘기의 성장은 인종적 정체성을 인식하며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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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비이성의 차별과 폭력이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라울 펙 감독이 강조하는 건 대중매체, 특히 지배적 가치를 무의식적으로 전달하는 영화의 속성이다. 곧 대중영화에서 흑인은 주로 주변부, 소수, 타자로서 ‘자연스럽게’ 무시되는데, 감독은 이런 상황을 유명 영화의 장면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니그로’(검둥이)라는 표현은 백인이 만들었다. 말하자면 백인에 의해 흑인의 특별한 정체성이 생긴 것이다. 영화 제목은 ‘나는 너희의 검둥이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이다’로 읽힌다. 더는 객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의 자기 정체성 선언이다. ‘니그로’를 ‘동양인’ 또는 ‘농민’ 같은 다른 정체성으로 대체하면 영화의 의미는 더욱 증폭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