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U-23 대표팀을 아시아 강팀으로 변모시킨 이끈 박항서 감독. [스포츠동아]
아시아 전체가 참가하는 공식 축구대회 결승에 동남아국가가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시아 축구의 패러다임까지 흔든 셈이다. 베트남은 들끓었다. 호찌민에 대형스크린이 등장했다. 빨간색 옷을 맞춰 입고 거리 응원에 나섰다. 주한 베트남대사관은 박 감독의 부인 최상아 씨를 초청해 감사를 표했다. 박 감독은 베트남 영웅이 돼 3급 노동훈장까지 받았다. 본인은 “내가 감히 어떻게 히딩크 감독님을 따라가겠느냐”고 조심스러워했지만, 베트남 국민은 박 감독이 그에 필적할 만한 성과를 냈다고 보고 있다. 베트남에 또 다른 한류가 일어난 셈이다.
히딩크식 접근법, 박항서가 판단한 베트남은?
결승전 당일 날씨부터 도와주지 않았다. 대회 장소인 중국 창저우에는 폭설이 쏟아졌다. 하루 일찍 일정을 마친 한국 U-23 대표팀도 비행기가 못 떠 귀국이 연기됐을 정도. 결승전 경기를 도중에 중단한 것도, 규정상 15분인 하프타임이 30분 더 늘어난 것도 다 눈 때문이었다. 결승전 상대인 우즈베키스탄 선수들과 달리 베트남 선수들은 거의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지면이 젖어 공 바운드는 물론, 공이 흐르는 속도도 완전히 달랐다. 눈 덮인 잔디밭을 뛰느라 체력 조절 역시 쉽지 않았다. 더욱이 베트남은 8강, 4강 모두 연장 혈투 끝에 승부차기를 벌였다. 팀 전체가 피곤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우즈베키스탄 대표팀을 괴롭힌 저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한일월드컵 대표팀처럼 말이다.히딩크 전 감독이 한국 땅을 밟은 건 2000년 12월이다. “한국에 관해 아는 거라곤 비행기에서 읽은 안내 책자 내용이 전부”라던 그는 곧장 동계 전지훈련에 돌입했다. 선수들을 접한 뒤 처음 내린 진단은 “한국 선수들은 체력이 약하다”였다. 쉽게 말해 스코어를 끝까지 지키거나 뒤집을 힘이 거의 없다는 것. 상대보다 더 뛰지 못하면 밀리는 게 이치다. 하지만 이는 더 많이 뛰면 기술이 부족해도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체력에 조직의 힘을 가미하면 색다른 무언가를 연출할 수 있다. 히딩크 전 감독이 한일월드컵 직전까지도 파워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선수단 체력을 각별히 관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박 감독의 접근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트남에도 기술 좋은 선수는 있다. 다만 평균 수준이 경쟁국에 비해 다소 떨어졌다. 대회 참가 연령대가 만 23세 이하란 점도 짚어야 한다. 틀이 어느 정도 굳은 성인 선수들로부터 단기간 내 기술 향상을 끌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많이 뛰는 것으로 보완해야 한다. 상대가 공을 이리저리 돌릴 때 그에 맞게 수비 전형을 계속 옮겨가며 재정비한다. 위험 진영으로 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것이다. 박 감독 부임 후 베트남 U-23 대표팀은 훈련 강도를 크게 높였다. 곡소리가 날 만큼 혹독한 훈련이었다. 한일월드컵 당시 과학적, 체계적으로 선수단 체력을 극대화한 박 감독의 노하우가 큰 자산이었다.
축구도 사람이 하는 일, 박항서의 비결은?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결승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아쉽게 패해 준우승을 차지한 베트남 선수들. [스포츠동아]
잘 다진 팀 위에 개인 기량을 얹었다. 철저하게 수비하고, 재빨리 공격으로 전환했다. 등 번호 6번 르엉 쑤언 쯔엉은 K리그에서도 탈압박 및 패스 능력을 인정받은 재목이다. 공을 빼앗으면 전방으로 나가는 첫 번째 패스를 도맡았다.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코스를 택하는 임무였다. 19번 응우옌 꽝 하이는 마무리를 맡았다. 토너먼트부터는 골을 넣어야 다음 단계도 보이는 법. 스피드가 빼어났으며 왼발 슈팅은 날이 서 있었다. 이번 대회 5골을 넣은 꽝 하이는 AFC로부터 “특별한 왼발을 갖췄다”는 극찬까지 받았다. 한일월드컵에서 황선홍, 안정환, 박지성 등이 풀어낸 득점 고민을 스스로 해결했다.
축구감독이 하는 일은 굉장히 복잡하다. 리버풀의 전설 스티븐 제라드가 리버풀 U-18 선수단을 시즌 절반 정도 지도한 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너무 힘들다”고 토로한 것만 봐도 그렇다. 단순히 상대를 분석하고 전술, 전략을 짜는 것을 넘어선다. 좋은 선수만으로 구성했다고 좋은 축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사람을 다루는 일이라 코칭스태프, 선수들과 인간적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불화로 좌초하는 팀이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영국 등에서는 감독을 단순히 가르치는 ‘코치(Coach)’보다 관리자 개념의 ‘매니저(Manager)’라 부른다. 베트남 U-23 대표팀이 더 많이 뛰어 이겼다는 건 겉핥기식 분석에 불과하다. 근원적으로 ‘어떻게 저 선수들을 더 많이 뛰게 했느냐’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선수들 스스로 납득하며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는 박 감독의 평소 성정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그는 대쪽같이 꼿꼿하게 일해왔다. ‘좋은 게 좋은 것’이란 타협이 뒤따랐다면 선수들 마음조차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베트남에 갓 도착했을 때만 해도 박 감독을 향한 시선은 썩 좋지 않았다. 아시아 축구강국으로 통하는 한국에서 왔다고는 하나 ‘한물갔다’는 반응이 거셌다는 후문이다. 그럼에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가 팀을 만들었다. 선수들과 함께 구르며 신뢰를 얻었다. 히딩크 전 감독이 한일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체코에게 0-5로 진 뒤에도 제 길만 걸었던 것과 비슷하다. 감독이 휘둘리지 않아야 선수들의 마음을 살 수 있다. 한 팀으로 뭉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이변이란 게 절대 쉬이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안된다’는 평가를 내놓을 때도 맞서 싸우는 용장이 필요하다. 박 감독은 축구 변방이던 베트남을 아시아 정상급으로 올려놨다. 한일월드컵의 기적이 베트남에서도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