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2009년 초 심문 과정에서 확보한 인민군 출신 탈북자의 증언. 최전방 특정 지역을 관할하는 최전방 군단에서 장기간 복무한 그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비무장지대(DMZ)를 관통하는 땅굴 작업을 그동안 집중적으로 해왔고, 일부는 군사분계선 이남의 출구를 뚫는 수준에 근접하는 등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진술했다(해당 탈북자의 신상과 지역명 등 구체적인 정보는 당국의 우려를 수용해 밝히지 않기로 한다). 군당국자들은 “위치와 규모 등의 정보가 매우 구체적이어서 해당 작업에 직접 관여했다는 진술에 신뢰성이 높았다”고 전한다. 특히 합동심문 과정에서 수차례 교차 확인한 결과 매우 자세한 부분까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등 ‘일관성 검증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것. 이른바 ‘제5땅굴’ 발견 가능성이 순식간에 높아진 셈이다.
군당국 내부에서 ‘65사업’이라 부르는 땅굴 탐사 임무와 관련 예산 집행은 합동참모본부(이하 합참)와 육군본부가 나눠 맡는다. 합참 정보본부에서 관련 정보를 분석해 탐사지역을 결정하면 육군본부 탐지과 인원이 현장에서 작업을 진행하는 식이다. 문제의 첩보에 대해 “지금까지 접수한 땅굴 관련 탈북자 첩보 가운데 가장 디테일하다”는 평가가 내려지자, 2009년 여름 이들 부서를 중심으로 해당 지역 일대에서 시추를 비롯한 각종 탐사 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고 당국자들은 전한다. 각도와 방향 등에 대해 문제의 탈북자가 기억하는 정보를 입체적으로 분석한 뒤 후보 지역을 특정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한 ‘주간동아’의 질의에 합참 측은 “일반적으로 (탈북자의) 심문 첩보는 과대포장된 증언이 많으나 여러 가지 검증 절차를 거쳐 심문을 통해 획득한 정보를 (땅굴 추적작업에) 활용하고 있다”고 에둘러 답했다.
흘러간 레퍼토리? 4세대 전쟁 방식!
당국자들에 따라 횟수에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종합해보면 앞서의 탈북자 첩보와 관련해서만 지난 2년간 6회 이상의 시추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휴전선 주요 축선에서 이뤄지는 통상 탐사까지 포함해 군당국의 탐사 작업은 동절기를 제외하고 꾸준히 이뤄졌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아직까지 진술에 부합하는 확실한 결과물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일부 당국자는 다만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정보당국은 물론 청와대까지 대면보고는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최근 수년간 땅굴에 대한 군과 정부의 상황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1960년대부터 항공기 격납고와 미사일기지 등 대규모 군사시설을 땅 밑에 건설해온 북한의 지하시설 건설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이 시기 평양이 스웨덴과 스위스로부터 굴착 장비를 대규모 수입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나의 갱도가 10개의 핵폭탄보다 효과적”이라는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라 1970년대 초부터 본격화한 북한의 침투용 땅굴은 각각 1974년과 75년, 78년, 90년에 발견됐다. 순서대로 이른바 ‘제1~4땅굴’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이후 땅굴 관련 진술은 인민군 출신 탈북자들이 높은 포상금을 노리고 활용하는 ‘단골메뉴’가 됐고, 탈북자 사회에서는 “사실로 확인되면 수억 원 규모의 정착금을 지급받을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북한에서 고위직이나 보안 업무를 담당했던 인사들이 흔히 다른 탈북자의 관련 진술을 평가절하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땅굴 관련 논란이 대부분 ‘헛소동’으로 끝나게 된 배경이다.
특히 2000년 경기 연천 인근에서 벌어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1군단 관할지역인 연천군 백학면 일대에서 지역 주민이 땅굴을 발견했고, 한 방송사가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이를 공개하자 큰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군당국은 물론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관련 기관의 전문가들까지 동원하는 대대적인 조사 작업을 거치고 나서야 천연동굴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 일부 단체에서는 “국방부가 남북 유화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땅굴을 감춘다”며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지만, 정치화한 땅굴 논란은 세간의 관심에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몇몇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일각에서 북한이 서울 인근이나 남양주, 인천 등 수도권 지역까지 장거리 땅굴을 굴착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 힘을 더했다. 군당국이나 전문가들이 대부분 이에 대해 회의적인 평가를 내렸기 때문. 공기 순환이나 배수 등의 기술적 과제만 놓고 봐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이었다. 전문가들은 수십km 수준의 땅굴을 한쪽에서만 은밀하게 뚫으려면 당장 토사를 처리할 방법조차 마땅치 않다고 말한다.
1975년 2월 북한 땅굴공사 착암 기술자 김부성(오른쪽) 씨와 유대윤 인민군 소위가 자신들이 관여했던 제3땅굴에 관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일련의 상황을 거치면서 땅굴 문제는 ‘흘러간 레퍼토리’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군 관계자들은 최근 수년간 진행된 한반도 안보환경의 변화로 그 군사적 의미가 비약적으로 커졌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이 이른바 비대칭 전략에 무게중심을 두고 인민군 전방부대의 편제를 변경한 것이 대표적이다. 전방군단에 경보병사단을, 전방사단에 경보병연대를 추가로 편성하는 등 지상 전력의 기동성을 크게 강화해 특수전 능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
2010년 말 발간한 ‘국방백서’는 유사시 산악으로 침투해 교란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 경보병 부대의 대표적인 침투 경로 가운데 하나가 땅굴이라고 기술했다. 이와 관련해 합참 측은 “땅굴은 총체적인 군사전력의 증강 없이도 상대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군당국이 제5땅굴 추적 작업에 속도를 내는 군사전략적 배경인 셈이다.
지상전력 운용 기획을 담당하는 한 군당국 관계자는 “이러한 흐름은 전력 열세가 분명해져 맞대결을 피할 수밖에 없는 평양이 최전선에서조차 게릴라 전술을 혼합한 ‘4세대 전쟁’을 구사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굳이 전면전이 아니더라도, 상대의 심리를 공격함으로써 전쟁 의지를 약화시키는 게릴라전 등의 저강도 전쟁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땅굴을 활용할 소지가 크다는 게 군당국의 판단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황무지에서는 이 같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이 엄청난 전력 우위를 보유한 미군 지상군을 수년째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한반도 안보환경과 북한 군사전략의 변화가 제5땅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낼까. 군당국의 추적 작업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