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아이들은 학교에서 벗어났을지 모르나, 학습에서는 해방되지 못했다.
김씨는 “대치동 여러 학원을 돌아다녔는데 대부분 ‘여름방학 특강’이라는 명목으로 주 2~3회, 하루 3~4시간 수업하는 데 수강료가 50만 원이었다. 여기에 영어·수학 등 부족한 과목의 개별 특강을 신청하면, 한 학원에 내는 수강료만 90만~100만 원에 이른다”며 혀를 내둘렀다. 개별 특강 수강료는 10만~15만 원.
대치동에서 만난 또 다른 주부 이미연(가명) 씨는 “이 지역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은 여름방학 때 보통 학원 5~6개를 다닌다. 6학년인 우리 아이는 3개를 다니는데, ‘적게 다닌다’고 아이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영어, 수학, 논술, 사회과학 과정은 기본. 주말에는 입학사정관제에 대비해 리더십, 자기주도 학습법을 배우는데, 그 비용도 40만~50만 원으로 만만치 않다. 여기에 창의력 교실이나 컴퓨터, 음악, 미술 등을 추가하고 운동도 배운다. 초등학생은 국내외 영어캠프를 많이 떠나지만, 보통 5~6학년이 되면 캠프보다 학원으로 눈을 돌린다. 본격적인 특목고 대비에 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아이를 둔 홍혜진 씨는 “영어와 수학이 각각 50만 원, 논술 18만 원, 과학 12만 원, 첼로 레슨 20만 원에 자기주도 학습법을 알려주는 학원과 각종 단기 캠프 등의 비용을 합하면 200만 원 가까이 든다”며 “방학 때 사교육비로 평소보다 100만 원은 더 쓰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방학 땐 평소보다 100만 원 늘어나 200만 원 육박
이처럼 여름방학을 맞아 사교육 시장이 달아오르는 것은 학부모들이 이때를 아이의 실력을 한 단계 올리는 절호의 기회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부모의 마음을 읽은 학원들은 저마다 고가의 방학 특강을 내놓았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손정숙 씨는 중학교 1학년인 아이를 인근 학원가의 학원에 보내는데 “평소 아이가 다녔던 영어학원의 경우 일반 과정은 싹 사라졌고, 고가의 방학 특강만 남았다. 수업을 아예 듣지 말거나 특강을 듣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고 했다. 하지만 수강료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떠나, 쉬어야 하는 방학 때 과도한 학습을 시키는 게 아이의 신체적·정서적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5학년 여름방학 때 6학년 2학기를 선행하는 거야. 그래야 다음 학기 때부터 중학교 공부를 하지, 알겠지?”
7월 24일 오전 10시, 대치동의 한 패스트푸드점. 학부모 차수연(가명) 씨는 초등학교 5학년인 딸 강현정(가명) 양을 앉혀놓고 빽빽하게 적힌 여름방학 일정표를 설명했다. 강양은 듣는 척 마는 척 그저 햄버거를 입에 넣다가 엄마가 말을 붙이기만 하면 손사래를 치며 짜증을 냈다.
6학년 안정원 양은 “이번 방학 때 수학, 영어, 논술, 컴퓨터 학원에 다닌다. 보통 하루 5시간씩 학원에 있고, 영어학원은 밤 8시에도 수업을 한다.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게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중학교 1학년 최윤지 양은 “하루 8시간 정도 학원을 다니는데, 제대로 집중하는 시간은 1~2시간에 불과하다”며 “수업시간에 종종 잔다”고 귀띔했다.
송파구 문정동 보습학원의 영어 강사인 정세민 씨는 최근 초등학교 5학년인 남학생이 강의실에서 갑자기 친구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더운 여름에 3~4시간씩 공부하다 보니 아이들이 무척 지쳐요. 쉽게 짜증을 내고 폭력적으로 변하죠. 한번은 한 아이가 사소한 말다툼에 친구의 뺨을 때려 혼낸 적이 있는데, ‘왜 그랬느냐’고 묻자 단지 ‘짜증나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하긴 어른들도 여름철에 일하기 싫은데, 아이들은 오죽하겠어요?”
아동심리 전문가들은 “방학 때는 학습량을 학기 중의 ‘절반 이하’로 줄이고, 학습을 한 후에는 반드시 놀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루를 오전, 오후로 나눠 오전에 공부를 하면 오후엔 놀게 해주고, 주중에 학습량이 늘어나면 주말엔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 즉 학습 후엔 반드시 놀이라는 보상을 줘야 한다는 말이다.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은 “방학은 어른으로 치면 휴가다. 이때 3~4시간씩 공부만 시키면 아이에게 불만이 쌓이는 것은 물론, 학습에 대한 혐오감이 생길 수 있다. 각종 체험학습도 아이가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시키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병원에 상담을 받으러 온 아이 중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 지나친 학습 스트레스로 중학교 입학 후 공부에 대한 열의가 확 꺾인 경우도 적지 않다.
“부모는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는 열심히 하다 중학생이 된 후 갑자기 이상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 경우 아이는 ‘어렸을 때는 힘이 없어서 하라는 대로 했지만, 이젠 도저히 못 참겠다’고 말하죠. 이런 상황까지 됐을 때 아이가 공부에 대한 열의를 되찾기란 무척 힘들어요. 아이가 얼마나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지 살펴보고, 알맞게 대처하는 게 중요합니다.”
자녀가 극심한 학업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판단했다면, 모든 사교육을 중단하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좋다. 부모가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는지 여부를 알아챌 수 있다. 두통, 복통, 어지럼증, 소화불량 등을 자주 호소하거나 틱 장애(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복적으로 근육을 움직이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는 증상)를 보이고, 주의·집중력이 떨어지거나 행동이 산만·과격해지며 짜증을 내면서 수시로 “죽고 싶다”고 말할 경우 ‘위험 신호’이니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아이가 만사에 무기력한 태도를 보일 때 특히 유의해야 한다.
명지대 아동심리학과 선우현 교수는 “아이들의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만성적 무기력증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우려했다.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사회성 키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10명 중 7~8명이 만성적 무기력증을 보였다는 것. 이런 아이들은 평소 조용하고 수동적이지만, 특정 상황에서 지나치게 짜증을 내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 충동적 성향을 보인다. 앞서 언급한, 학원에서 친구의 뺨을 때린 아이도 비슷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선우 교수는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라면, 비싼 비용을 들여 무조건 학원에 보내는 대신 스스로 하루 시간표를 짜게 하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방학 때, 어떤 학원에서 어떤 과목을 들을지, 어떤 캠프에 참여할지, 어떤 체험학습을 하거나 미술관, 박물관에 갈지 등을 모두 아이가 직접 결정하게 하라는 것이다. 부모는 못마땅한 부분이 있더라도 우선 아이가 경험해보게 한 뒤 조언한다. 그래야 부모의 조언이 잔소리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아이와 부모가 서로 의논해 학습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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