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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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측천무후 50여 년간 국정 쥐락펴락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태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8-02 14: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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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실의 측천무후 50여 년간 국정 쥐락펴락

    1 태릉은 능침과 정자각 사이가 길며, 기(氣)를 모으는 언덕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태릉(泰陵)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의 제2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의 능호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23-19에 있으며 사적 제201호로 지정돼 있다. 훗날 사가들은 문정왕후를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종종 비교한다. 그는 중종,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50여 년간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권력욕이 강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표독하고 독살스러운 인물로 그려졌다. 그래서인지 문정왕후의 능은 일반 왕후의 능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특이하게 조영됐다.

    태릉의 능침은 양주 노원면 대방리(현 노원구 공릉동)에 종산을 수락산으로 하고 주산을 검암산으로 한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 형국에 자리 잡았다. 앞에 흐르는 공릉천이 명당수다. 능침은 북서에서 남동향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 언덕에 단릉(單陵)으로 예장돼 있다. 능역의 왼쪽에 태릉선수촌, 명종·인순왕후의 강릉, 삼육대가 이어지고 전면에는 육군사관학교, 오른쪽에 사격장과 놀이동산, 서울여대가 있다.

    문정왕후는 1565년 4월 6일 아침 삼정승 등 조정의 대신을 모이게 한 뒤 언서유교(諺書遺敎·한글 교서)를 내리고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했다. 보기 드문, 그러나 문정왕후다운 대왕대비의 교서였다. 문정왕후는 교서에서 명종이 허약하고 후손이 없음을 염려하며 자신의 상례에는 고기를 먹지 못하는 예를 무시하고 주상의 몸을 보양케 하라고 명했다. 중년의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밖에 교서에는 왕실에 대한 충성과 그녀가 중흥한 불교의 보존, 자신의 친정 일가로 장경왕후 딸인 효혜공주의 제사를 모시는 윤백윤 일가의 면죄를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이 교서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승하 당일 문정왕후의 정치적 간섭을 탓하면서 ‘서경(書經)’의 목서(牧誓) 편을 예로 들며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비난했다.

    왕릉을 능가하는 웅장한 능



    문정왕후는 16세에 중종의 중전이 돼 28년간 왕비를 지내고 아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이렇듯 50여 년간 왕실의 어른 노릇을 하며 국정을 쥐락펴락한 여장부였으니 중국의 측천무후나 서태후에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정왕후는 1501년 영돈령부사 윤지임의 딸로 태어났다. 1518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요절하자 급히 왕비로 책봉됐다. 왕실에 들어와 딸만 넷을 낳은 문정왕후는 어린 세자(장경왕후의 아들, 훗날 인종)를 기르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 왕비가 된 지 거의 20년 만에 중종과의 사이에 경원군을 낳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싶었다.

    세자를 앞세운 윤임 일파(대윤)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 일파(소윤) 사이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대윤 쪽이 유리한 듯 보였다. 죽은 장경왕후의 아들인 세자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의 측천무후 50여 년간 국정 쥐락펴락

    2 도성의 동쪽에 태산을 봉하면 국가가 안정된다는 이론에 따라 공릉동에 조영한 태릉의 전경. 3 큰 얼굴에 퉁방울눈, 우람한 코의 무석인이 ‘국태민안’을 지키는 듯하다.

    그러나 몸이 약한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주도권은 소윤에게 넘어갔다. 일설에는 인종이 문정왕후가 전한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그토록 바라던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12세의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동시에 윤원형 일파에 의한 ‘외척 전횡시대’가 도래했다. 이들은 정적을 제거하고, 부정축재를 일삼아 원성이 자자했다. 어린 명종은 어머니와 외척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의 소개로 봉은사 승려 보우를 만나 불교에 심취했다. 보우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승과제도를 도입하는 등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에 앞장섰다. 봉은사는 문정왕후 시아버지인 성종의 선릉과 남편 중종의 정릉의 능침 사찰이었다.

    미약한 왕권을 이용해 조정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리사욕을 채우자 사회는 어수선해지고 병들어갔다. 설상가상 흉년마저 들어 굶주린 백성이 도적 떼가 되기도 했다. 양주의 임꺽정이 민란을 일으켰고, 이를 틈타 왜구가 쳐들어왔다.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명종은 민란을 평정하고 왜구를 퇴치하느라 곤욕을 치렀고, 백성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문정왕후 세력은 정적 제거에만 몰두해 1547년 음모를 꾸몄다. 양재역 부근에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들이 날뛰니 곧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벽서를 붙인 뒤 윤임 등이 역모를 기도한 증거라고 몰아세웠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다. 이때 희빈 홍씨(중종의 후궁)의 소생인 봉성군이 반역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은 지금의 태릉 터에 모셨다. 당대의 지관이며 예언가였던 남사고(南師古)가 “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라고 한 말에 따라 문정왕후를 태릉에 모시고 훗날 자신도 바로 옆 강릉(康陵)에 안장됐다.

    문정왕후는 생전에 남편 중종(1488~1544)의 능을 옮겼다. 원래 중종은 고양시 서삼릉 내에 있는 희릉(장경왕후의 능)의 오른쪽에 묻혔으나, 1562년(명종 17) 중종과 같이 묻히기를 원했던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현재의 강남구 정릉(靖陵) 터로 천장했다. 그러나 정릉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오고 세자가 죽는 일이 잇따르자 명종은 “천장 후 나라에 좋은 일이 없고 변고가 생기니 다시 가서 산릉을 찾으라”고 명령해 결국 공릉동에 안장됐고, 문정왕후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국가안정론을 이유로 1950년대 현 육군사관학교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조선 왕실의 측천무후 50여 년간 국정 쥐락펴락

    4 태릉의 능침은 장엄하고 우람해 문정왕후 생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5 정교하게 조각된 태릉의 무석인.

    그래서인지 태릉은 왕비의 능이지만 웅장해서 여장부였던 문정왕후의 모습을 짐작게 한다. 능호도 크고 편안하다는 의미에서 태릉이라 했다. 특히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조선 능원 가운데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岡·언덕)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왕후의 정권욕을 잠재우려 했던 왕과 신하들의 뜻이 아닐까?

    태릉은 명종의 명으로 ‘국조오례의’에 나타난 대비의 상례가 아닌 대왕의 상례를 따랐다. 봉분 아래는 운채(雲彩)와 12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으로 두르고,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했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앞면 중앙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12간지를 문자로 새기는 것은 세조 때 능역 조성을 간소화하면서 병풍석의 신상(神像)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으로 등장했는데, 태릉에는 신상과 문자가 병용돼 주목을 끈다. 이 능역의 조성을 위해 상당히 많은 인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보인다.

    정권욕 잠 재우려 언덕 약하게 조성

    태릉의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큰 형태다. 무석인은 특히 퉁방울눈에 코가 유난히 크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로,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수 (頭)를 쓴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쪽의 문석인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는 반면 오른쪽의 문석인은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의 경우는 다르다. 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문·무석인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다.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의 금천교를 볼 수 있다. 앞쪽의 부러진 금천교는 외금천교로 전해지는데 1950~60년대 서울여대 앞쪽 화랑로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릉 전면의 물길은 오랜 세월 상부의 마사토 등이 흘러와 퇴적하면서 물의 흐름이 막혀 다리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사라진 물길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자각은 6·25전쟁 때 파손돼 석축과 초석만 남은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월랑(月廊)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으로 1970년대 태릉 능역 안에 만든 놀이동산과 사격장을 철거하고, 소실된 재실과 어정을 복원해야 한다.

    중종의 정릉과 성종의 선릉은 1592년 일본군에 의해 도굴되고 시신이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다. 임진왜란 직전 조영된 문정왕후 태릉도 ‘효인’이라는 자가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년 1월 일본군이 기마병 50명과 주민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삼물의 회(灰)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릉 주변의 송림, 좌우 능선과 계곡에 있는 굴참나무 숲과 진달래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생태 경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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