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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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본능과 투쟁의 스포츠”

소설가 김별아씨의 ‘월드컵 세상’ … 결코 뿌리치지 못할 ‘집단성의 희구’

  • < 김별아/ 소설가·‘축구전쟁’ 작가 >ywba@chollian.net

    입력2004-10-08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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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는 본능과 투쟁의 스포츠”
    얼마 전 볼일이 있어 정말 오랜만에 효창운동장에 들렀다. 때마침 경기가 없는 날이었고, 며칠 전 끝난 경기의 대진표가 생뚱맞게 붙어 펄럭이고 있었다.

    경기가 없는 경기장은 마치 사랑을 잃은 소년처럼 풀이 죽어 우정 쓸쓸하고 서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2002 한·일 월드컵에 즈음해 3조원의 투자비용으로 건설된 7개의 축구전용구장, 3개의 종합경기장에 밀려 이제는 애물처럼 취급되는 효창운동장을 나는 말없이 몇 바퀴쯤 걸어 돌았다.

    하지만 명멸하는 별처럼 화려하게 나타나고 스러지는 스타플레이어 중 누구 하나도 이곳을 거쳐가지 않은 이 없으리라.

    비만 오면 벌건 진흙탕으로 변해 경기를 할 수 없었던 맨땅, 슬라이딩 한 번에 화상을 입고 넘어지면 화학물질에 상처를 입어야 했던 공포의 인조잔디 구장에서 한국 축구는 자라났다. 아무리 혹독한 조건에서도 승리의 감동과 패배의 좌절은 엄연히 존재했으며, 신산한 역사 속에 면면히 살아남은 인간만큼이나 축구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가장 오래 전부터 인간에게 익숙했으며, 가장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들끓게 하며, 현재의 우리가 아득한 과거로 밀려날 먼 훗날까지도 가장 질기게 살아남을 것이라는 장담을 거침없이 하게 하는 스포츠가 바로 축구다.



    동물학자들은 인간이라는 동물 앞에 돌연히 굴러온 장애물이 그들의 존재감보다 그 부피가 크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발로 그것을 걷어차는’ 인간의 본능을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했으려니와,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인간에 내재된 수렵의 본능과 충동이 어떻게 스포츠에 반영되고 실현되었는지 누누이 설명해 왔다.

    그렇다. 축구는 투쟁의 스포츠이며, 원시의 스포츠이며, 정열과 본능의 스포츠다. 인류가 멸족하지 않는 한, 삶을 향한 지난한 투쟁과 욕망의 꿈틀거림이 불가사의한 어떤 사태로 돌연 잦아들지 않는 한 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60억 인구는 저마다의 기대와 흥분으로 밤잠을 설치고, 격정을 맛보고, 출렁거리며 흔들린다. 스스로의 공이 타인의 그물을 흔들 때마다, 자신의 그물이 타인에 의해 흔들릴 때마다 희망과 절망의 극단까지 부침을 거듭하면서 이 터무니없이 단순한 경기에 몰두한다.

    문제는 있다. ‘축구’를 통해 드러나는 위험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스포츠와 금권의 추악한 결탁관계, 선수들의 발끝에서 통통 튀는 경쾌한 축구공이 숨기고 있는 유아노동과 제3세계 노동착취의 문제까지…. 나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알고 있다. 그것에 관한 끊임없는 환기의 움직임도 우리 사회의 성숙의 징후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잠시 잊으련다. 경기를 보는 바로 그 순간, 지금껏 알거나 배웠거나 설득당해 주억거렸던 모든 편견과 사심을 잊으련다. 어쩌면 무지와 단순한 본능만 가득한 상태로, 나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좇아, 공을 따라 그들의 그라운드에 함께하련다.

    먹먹해진 상태에서 나는 느낀다. 내 귓가를 스쳐 뺨을 비비고 사라지는 바람, 발 아래 밟히는 온기와 습기를 머금은 대지, 헐벗은 맨몸으로 정해지지 않은 승부를 향해 치달아가는 가련한 인간의 슬픈 운명을. 나는 웃으면서, 때로 울면서, 고함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철퍼덕 주저앉으면서 오로지 바라본다. 내가 살아 있는 선명한 순간을, 나를 향해 거칠게 부대껴오는 삶을, 순정한 집단성의 희구를 외면하지도 뿌리치지도 않는다.

    즐기라! 느끼라! 그리고 만끽하라!

    축구가 우리를 향해 말을 건네온다. 나는 그의 부름에 그의 투명한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한다. “예스(Yes)!” 나는 나를 긍정한다. 삶의 지순한 한순간을, 거침없이 긍정한다. 그리하여 그때 비로소 축구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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