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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한.글.상.상.’에 전시된 작품은 모두 한글이라는 재료를 부려 만든 것이다. 안상수는 타이포그래피, 즉 글자를 이용해 텍스트의 시각성을 높이는 작업을 25년째 해오고 있다. 그러나 타이포그래피를 단순히 문자 디자인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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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자체를 조형의 도구로 삼은 안상수의 작품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상상력의 폭이다. 다다이즘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에게 바친 ‘문자도: 마르셀에의 경의’에서 뒤통수에 자신의 이름 머리글자인 ㅇ과 ㅅ 모양을 새겨 이발을 하는가 하면, 한글의 마지막 자음인 ㅎ의 꼭지를 늘여 알파벳의 두문자 a로 연결시킨 ‘a, 그리고 ㅎ까지’ 등 작가의 상상력은 거침이 없다. 이 같은 상상력은 ‘언어는 별이었다… 의미가 되어… 땅에 떨어졌다’와 ‘한글 만다라’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의 상상을 통해 한글은 우주와 삼라만상의 이치에까지 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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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갤러리와 9개월간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이 개인전을 안상수는 “유쾌한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작가의 작품인 동시에 기획자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는 로댕갤러리가 나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맞춰 나를 표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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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저 근사한 글자꼴을 만들려고 했지만 잘 안 되었어요. 한글의 조형원리를 탐구하다가 안상수체까지 가게 되었죠. 또 한글은 그 자체로 디자인적인 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조형적 원리를 가지고 탄생한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전통문양과 한글, 이상(李箱)의 시와 타이포그래피를 연결하기도 한 그의 상상력은 최근 한글의 상형성을 향해 가고 있다. 그는 쐐기문자나 상형문자 같은 고대문자를 보면 거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력을 느낀다. “한자 같은 상형문자가 표음문자를 추구하고 표음문자인 한글은 상형문자를 추구하는 것 같아요. 컴퓨터 아이콘 중에도 휴지통이 있고 거기에 문서를 버릴 수 있잖아요? 새로운 현대의 상형문자가 등장한 셈이죠.”
전시작품 중에는 흰 페인트로 칠해진 ‘한글 대문’이 있다. 로댕갤러리측이 작가의 집 대문을 삼고초려 끝에 가져와 전시한 것이다. 한글 자모를 용접해 붙인 흰색 문은 마치 경쾌한 조형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였다. 그 문을 밀고 문자의 우주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에 문득 손이 꿈틀거렸다(7월21일까지. 문의 : 02-2259-7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