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우울증 급증해도 정신병력 두려워 치료 못 받아
공무원, 장교, 국정원 응시자는 진료기록 보여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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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4년 차인 박모(30) 씨의 말이다. 박씨는 최근 국가 정신건강검진에서 우울증 의심 판정을 받았다. 다소 충격적인 결과일 수 있지만 그는 “그럴 줄 알았다”고 했다. 박씨는 “정말 출근하기 싫은 날이 있다. 상사가 내 성과를 가로채거나, 타인의 실수 때문에 대신 혼난 다음 날, 혹은 회사에 다니면 다닐수록 나 자신이 소모된다는 느낌이 드는 날 말이다. 사실 당분간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선다”고 말했다. 출근길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설 때면 그는 ‘여기서 구르면 당분간 출근하지 않아도 될 텐데’라는 생각도 든다고. 다행히 그는 “병원비나 다친 뒤 회사의 반응 등을 상상해봤고, ‘죽지 않을 거라면 계단에서 구르는 일은 포기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털어놓았다.
심각해 보이지만 박씨는 병원 정신건강과를 찾을 생각이 전혀 없다. 그는 “기록이 남는 게 꺼림칙하다. 의무기록은 쉽게 열람할 수 없다지만, 신뢰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별 의미도 없다. 만약 진료 결과 중증 우울증이라 해도 쉴 수가 없다. 회사에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알리고 나면 승진은 물론 회사생활에 빨간불은 몰라도 노란불은 켜질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가장 빠르게 우울해지고 있는 2030
우울 증세를 겪는 젊은 세대. [GettyImages]
우울 증세는 다른 세대보다 청년 세대가 더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11월 29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바른미래당 이태규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0대 우울증 환자는 총 9만8434명으로 2014년(4만9975)에 비해 2배 가까이(97%) 늘었다. 30대는 같은 기간 7만390명에서 9만3389명으로 33% 증가했다. 이 기간 우울증 발병률이 가장 가파르게 오른 인구층은 20대 남성으로, 우울증 환자가 4년 만에 102% 늘어났다. 반면 기존에 우울증 환자가 많던 노인층은 조금 덜 우울해졌다.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우울증 의심 노인 비율이 32.3%에서 7.3%로 대폭 줄어든 것. 이 의원은 “특히 20대 우울증·조울증 환자의 급증은 개인적 문제도 있겠지만 학업, 취업 등 사회구조적 환경에서 비롯된 문제일 개연성이 높다. 각별한 사회적 관심과 함께 교육·입시제도와 불공정한 사회구조에 대한 성찰적 고민 및 대책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난 만큼 자살 기도도 증가했다. 보건복지부의 ‘2018 자살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대의 자살 기도가 다른 연령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자살 기도 원인으로는 ‘정신과적 증상’이 35.1%로 1위를 차지했고, ‘대인관계’가 30.3%였다. ‘급격한 금전 손실’은 8.4%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2018년 자살 기도자 중 20대의 비율은 32%이며, 30대와 합치면 49%로 전 연령대의 절반에 가깝다. 젊고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일수록 그 위험성이 커진다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상담사는 “젊은 층은 애초에 재산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급격한 금전 손실보다 미래에 대한 비관 또는 직장 상사나 연인 등 대인관계 문제로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통계에서는 고연령층일수록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많았다. 중앙자살예방센터 집계에 따르면 80대 이상 남성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150.5명으로 전 연령대 가운데 가장 높았다. 남성은 연령이 어릴수록 자살률이 낮아져 20대는 19.9명, 30대는 31.3명이었다. 자살 기도자는 젊은 세대가 많은데 실제 자살률은 고령층에서 높게 나타나는 이유가 젊은 층의 건강 상태가 상대적으로 좋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젊은 세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시도해도 조기에 발견되면 그만큼 살아날 확률이 높다는 것. 그렇지만 이 세상을 등지고 도망가고 싶은 세대는 중년도, 노년도 아닌 청년이라는 것이 요즘의 실상이다.
지금 가장 힘든 세대는 2030
젊은 우울증 환자는 병원 정신건강과 진료 이력이 남는 것이 두려워 치료받기가 쉽지 않다. [GettyImages]
우울증도 병이니 치료받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치료받으러 가기가 쉽지 않다. 병원 정신건강과 진료 이력이 남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취업이나 이직을 앞둔 사람은 특히 그렇다. 물론 직원의 동의 없이 의사가 개인의 의무기록을 열람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의료법’ 제21조 2항에 따르면 의료인 및 의료기관은 환자가 아닌 제3자에게 환자에 대한 기록을 열람하게 허가하거나 사본을 내줄 수 없다. 이를 어기면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어떤 회사라도 입사 지원자나 직원의 의무기록을 열람할 수 없다.
물론 예외는 있다. 판사와 검사, 장교, 국가정보원 직원 등 일부 직종은 의무기록 열람이 허용된다. 따라서 이러한 직종을 목표로 취업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는 쉽사리 정신건강과 진료를 받을 수 없다는 게 취업준비생들의 이야기다.
일반 기업에서는 의무기록 자체를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한 대기업 인사업무 관계자는 “아예 취업 결정 후 건강검진으로 대체하는 회사가 많아지는 추세다. 건강검진에서는 말 그대로 기본적인 신체 정보만 파악하기 때문에 정신건강과 의무기록 등은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울증을 앓는 청년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거의 매년 정부 및 의료기관에서 의료정보 유출 사고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이, 2017년과 2015년에는 일선 병원이 환자 정보를 대거 유출한 사고가 있었다. 실수로도 유출되는 것이 의료정보인지라, 취업시장에서 “안심할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취업준비생은 불안, 직장인은 무용
8월 27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금융권 공동 채용 박람회에서 취업 준비생들이 모의 면접을 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일부 직장인에게는 정신건강과 진료가 의미 없다. 보통 몸이 아프면 병가, 휴식 등 선택지가 있다. 병가를 내려면 회사에 진료기록을 제출해야 하는데, 정신건강과 진료기록을 내기가 두렵다. 승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직장인 양모(31) 씨는 정신건강과 진료를 포기했다. 그는 “어차피 진료받아봤자 그 내역으로 휴직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승진을 포기했다면 모르지만, 계속 회사 생활을 원활히 해나가려면 굳이 진료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정신건강과 진료를 받으면 일부 보험사가 보험 가입을 거부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직장인 장모(38) 씨는 “생명보험에 가입하려 했는데, 보험설계사가 ‘정신과 진료 이력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보험 가입 시에는 가입자가 신체 상태에 대해 밝힐 의무가 있다며 다그쳤다. 결국 솔직히 이야기했고, 연락을 주겠다더니 결국 ‘보험 가입이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정신건강과 진료기록이 있다고 보험 가입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2010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민간보험 가입에 차별받는 환자에 대한 대책’이라는 안내문을 발간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정신건강과 치료 이력을 숨겨선 안 된다. 하지만 정신건강과 진료기록이 있다고 가입이 거절돼서도 안 된다. 만약 가입을 거절한다면 감독기관에 민원을 제기하거나 분쟁 상담을 할 수 있다.
물론 진료기록을 남기지 않고도 정신과 상담 및 진료를 받는 방법은 있다. 국민의료보험 혜택을 포기하고 일반 상담으로 진료를 받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받는 진료는 코드 가운데 F코드(정신 및 행동장애)로 상담 및 약물치료를 받게 된다. 반면 일반 상담은 Z코드로, Z코드가 찍힌 약물만 처방받으면 진료기록이 남을 가능성이 낮다. 그렇지만 보험 혜택이 없어 진료비가 올라간다. 비보험 진료비와 약값은 국민건강보험을 적용할 때보다 3~5배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Z코드로도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일부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물론 당국은 국민건강보험 혜택 확대는 어렵다고 말한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Z코드에 약물 처방까지 포함되면 수가 혼동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일단 정신건강과 진료에 대한 부정적 시선, 사회적 낙인부터 해소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