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테러 직후 ‘Covered In Rain’이라는 곡으로 미국 국민을 위로했던 록 뮤지션 존 메이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 20대 초반 김민기가 김지하의 시에 멜로디를 입혀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의 김창남(현 성공회대 교수)에게 노래하게 했던 곡이다. 훗날 양희은이 다시 부르기도 했다. 절정부에서 김창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절하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반복한다. 하지만 주는 없었다. 시간은 기적의 농도를 희석시켰다.
한반도를 뒤덮은 우울의 구름 아래서 다른 노래가 생각났다. 싱어송라이터 이장혁의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실재했던 오케스트라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만든 노래다. 역시 유대인으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 멤버들은 가족과 친구가 가스실로 끌려가는 걸 보며 바이올린을, 첼로를 연주해야 했다. 그 심정을 이장혁은 나지막이, 그리고 허무하게 노래한다. ‘주여 어디에 어디 계시나이까/ 정녕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중략) 저기 내 어머니가 타고 있네 내 어린 동생이 타고 있네.’ ‘탄다’는 단어가 다른 의미로 전이돼 가슴을 후볐다.
택시를 탔다. 이미 TV에서는 모든 음악방송을 중단한 상태였다. DJ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지연의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김현식의 ‘언제나 그대 내 곁에’가 연달아 흘렀다. 늘 사랑노래로 들리던 곡들이 평소와 달리 마음에 꽂혔다. 이별과 고뇌를 다루는 어떤 한국 노래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아이돌이 점령한 TV에서는 그나마 그런 기분마저 느끼기 어려웠겠지만 말이다.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의 양면성을 가진 대중음악에서 ‘예술’을 외면한 TV가 음악방송을 중단한 이유는 그래서 수긍이 가기도 했다. 일종의 자승자박이었다. 하지만 음악은 이럴 때일수록 종종 위로를 전한다. 가사 때문에 한 번 걸러 들리는 외국 노래도 일종의 심리치유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레게의 아버지 밥 말리의 ‘High Tide Or Low Tide’를 먼저 권한다. ‘잘 될 때건 안 될 때건 언제나 당신 편에 있겠어요’라고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는 이 곡에서 자못 애잔하다. 도입부부터 반복되는 피아노 반주가 그 애잔함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전남 진도와 경기 안산에 있는 이들에게 전하는 우리 마음이라 믿고 싶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록 뮤지션 가운데 한 명인 존 메이어는 라이브 앨범 ‘Any Given Thursday’에서 ‘Covered In Rain’을 부른다. 그는 ‘세상이 점점 차가워지는 요즘’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2001년 9·11테러 당시 느꼈던 감정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막연한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5분여 동안 울어대는 그의 기타 연주다. 9·11테러 이후 미국 뉴욕에서는 회색의 음악이 쏟아졌다. 메이어는 뉴요커의, 미국인의 잿빛 마음에 다시 선명한 색을 돌려줬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상황은 좋지 않다. 이 글이 읽힐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 절망에서 바랄 유일한 것은 기적이다. 레너드 코헨의 ‘Waiting For The Miracle’이다. 그렇잖아도 어두운 그의 목소리가 이 노래에서 더욱 어둡다. ‘I’m Your Man’ ‘Take This Waltz’ 같은 노래의 낭만 따위는 없다. 그렇기에 ‘기적’이란 단어가 간절하게 빛난다. 만에 하나, 아니 재난 역사상 초유의 기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믿음은 우리가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실낱같은 빛줄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