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뒤의 사나이’라 불리는 조너선 아이브 부사장. 그는 변기, 세면대 등 욕실용품 디자이너였지만 현재 애플의 디자인을 진두지휘하는 핵심 인물이다.
조너선 아이브는 1967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뉴캐슬 폴리테크닉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 뒤에 탠저린(Tangerine)이라는 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해 다양한 디자인 컨설팅을 했다. 1992년 고객이었던 애플이 그를 스카우트했다. 사실 그가 애플에서 일을 시작할 때는 그렇게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자유로운 디자이너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디자인 컨설팅을 하던 그가 갑자기 복잡한 제품기획을 하며 풀타임으로 회사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기 때문.
특히 기술적으로 제한이 있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디자인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다양한 제품개발팀에 들어가서 일을 했지만, 뉴턴(Newton)과 같이 성공하지 못한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었고, 기본적으로 애플이 당시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능을 펼쳐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애플을 재건하기 위해 잡스가 복귀하면서부터다.
잡스는 애플의 정체성과 핵심 가치를 확립하는 혁신 작업을 먼저 시작했다. 이런 혁신의 방향에서 볼 때 아이브는 잡스가 가장 원하던 인물이었다. 잡스는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애플의 부활을 이끌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아이맥 디자인의 전권을 맡겼다. 아이맥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디자인한 아이브는 단숨에 세계 디자이너의 찬사를 받았다.
아이브는 “애플의 디자인팀은 거의 하늘에서 내린 멤버로 구성됐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디자인팀에 강한 신뢰를 보인다. 핵심 디자인팀을 작게 유지하면서 첨단 도구와 프로세스에 많은 투자를 함으로써 협업의 강도를 높이는 전략을 쓴다. 개인 공간을 주지 않고, 큰 공간을 공동으로 쓰면서 끊임없이 토론과 회의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하는 방식으로 효율을 극대화한다.
그는 애플 디자인의 비밀은 새로운 재질과 프로세스, 그리고 제품 아키텍처의 혁신이라고 밝혔다. 플라스틱 폴리머 기술이 발전하자 이를 이용해 다양한 기능성을 갖춘 제품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이맥이다. 최근에는 레이저를 이용한 접합과 혁신적인 접착제 등을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애플의 디자인은 단순한 미술적 디자인이 아닌, 기술과 디자인이 만나 만들어낸 총체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천재적 재능이 있는 디자이너이기에 잡스의 후계자로 아이브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가 잡스가 떠난 자리에 최고경영자(CEO)로 올라설 것이라는 관측은 많지 않다. 그가 카리스마도 갖추고 대중성도 있는 인물이지만, 애플은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기술기업이라 근본적 태생을 바꾸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애플의 차기 선장 자리를 맡는다면, 팀 쿡보다 훨씬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 정지훈 교수는 의사이면서 IT전문가란 이색적인 경력을 지니고 있다. 현재 관동대 의과대 명지병원 융합의학과 교수이자 IT융합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IT의 역사’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