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08년 4월 6일. 플레이오프 외나무다리에서 양 팀이 또 만났다. 앞서 두 경기에서 1승씩을 나눠 가진 양 팀의 챔피언결정전 진출이 달린 마지막 승부. 시작은 장광균과 브라질 용병 보비를 앞세운 대한항공이 좋았다. 1세트를 25대 17로 가볍게 가져왔다. 하지만 뒷심이 또 문제였다. 2세트 중반부터 조직력이 흔들리더니 내리 3세트를 내줬다. 경기가 끝난 뒤 대한항공 신영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올 시즌 희망을 봤습니다. 반드시 우리도 챔피언결정전에 올라 저들만의 잔치에 마침표를 찍겠습니다.”
마침표를 찍는 게 생각만큼 쉽진 않았다. ‘저들’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엔 허점이 없었다. 프로배구 원년인 2005시즌부터 지난 시즌까지 챔피언결정전 대진은 언제나 두 팀의 몫. 우승컵은 삼성화재가 4번, 현대캐피탈이 2번 나눠 가졌다. 대한항공은 만년 3위였다. 초반 잘 나가다가도 항상 고비마다 두 팀에 덜미를 잡혔다. 감독도 바꿔보고, 용병도 바꿔보고, 선수들 포지션도 바꿔봤지만 벽을 넘지 못했다. 2006∼2007시즌부터 플레이오프 최종 순위는 4년 연속 3위. 정규리그에선 3위 3번, 2위 1번을 차지했다.
선수를 춤추게 한 그림자 리더십
오랜 기다림이 마침내 빛을 봤다. 2011년 3월 6일 오후 경북 구미의 박정희체육관. 대한항공은 홈팀 LIG손해보험을 세트스코어 3대 0으로 제압하고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지었다. 만년 3위 꼬리표를 뗀 순간 선수들은 코트를 떠나지 못했다. 세터 한 선수는 한동안 코트에 누워 일어나질 못했고, 주포 김학민은 닭똥 같은 눈물을 쏟으며 감격을 표현했다. 이날까지 23승4패란 독보적인 승률을 올린 것도 그렇지만 ‘쌍두마차’에 시원하게 설욕했다는 점에서 우승 감격이 더 컸다. 대한항공은 올 시즌 삼성화재에 3승1패, 현대캐피탈엔 4전 전승을 거뒀다. 특히 현대캐피탈과의 경기에선 한 세트도 허용하지 않으며 “강팀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완전히 털어냈다.
대한항공이 이렇게 고공비행을 하게 된 이유가 뭘까. 가장 중요한 열쇠는 역시 신영철 감독이다. 지난 시즌 중반 부진에 빠진 대한항공의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은 그는 올 시즌 정식 감독으로 취임한 뒤 팀 체질 개선에 앞장섰다. 언제나 선수들에게 “3위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변해야 산다”고 강조했다. 대한항공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시즌 전 이례적으로 팀 미팅을 여러 차례 했다. 일부 선수는 심리치료사의 도움까지 받았다. 모두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기 위해서였다.
신 감독은 선수의 성격은 물론 혈액형, 가족관계, 취미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선수 개개인에게 맞는 맞춤형 지도를 위해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게 그의 설명. 또 “우리 팀엔 개성 강한 선수가 많다. 그래서 윽박지르기보단 잘한다고 격려했다. 선수가 스스로 깨닫게끔 옆에서 조용히 도와줬다”고 했다. 결국 세심한 그의 ‘그림자 리더십’에 개성 강한 선수들도 마음을 열었다. 서남원 대한항공 코치는 “감독님 부임 이후 선수들 표정이 밝아지고 대화도 많아졌다. 팀플레이를 저해했던 톡톡 튀는 개성이 이젠 상대팀을 위협하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고 말했다.
기본을 강조한 신 감독의 전략도 주효했다. 올 시즌 대한항공의 훈련 강도는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수비, 리시브 등 기본기와 관련한 훈련 시간이 50% 이상 늘어났다. 권혁삼 대한항공 사무국장은 “평소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신 감독이지만 기본기 훈련을 소홀히 한 선수에겐 엄청난 불호령이 떨어진다. 명세터 출신답게 ‘겉멋’ 든 배구보다 ‘담백’한 배구를 선호한다”고 전했다. 김세진 KBS N 해설위원은 “확실히 이번 시즌 대한항공의 기본기가 탄탄해졌다. 원래 우수했던 공격 자원에 안정적인 수비와 리시브가 더해지니 당해낼 팀이 없다”고 감탄했다.
공격에선 신 감독 특유의 ‘벌떼 배구’가 빛을 봤다. 에이스의 능력으로만 따진다면 가빈 슈미트(삼성화재)의 파괴력, 문성민(현대캐피탈)의 스피드를 따라갈 선수가 팀에 없다는 게 신 감독의 생각. 그래서 그는 사용 가능한 수준급 공격 자원이 많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상대팀, 경기 상황, 전술 등에 따라 다양한 공격 카드를 폭넓게 썼다. 기존 대한항공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약속된 패턴 공격도 자주 시도했다. 그 덕분에 대한항공은 몇몇 선수의 컨디션에 좌우되지 않는 단단한 팀이 됐다.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은 “대한항공 공격의 가장 큰 무서움은 다양성”이라며 “특정 선수에게 수비를 집중하기 어려워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전했다.
공격과 수비 겸비 단단한 팀
신예 곽승석은 2010~2011시즌 대한항공 돌풍을 이끌었다.
곽승석의 활약으로 날개를 단 대한항공의 상황은 ‘디펜딩 챔피언’ 삼성화재와 대조돼 눈길을 끈다. 삼성화재는 팀의 구심점인 석진욱의 공백으로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리그 5할 승률을 간신히 넘겨 체면을 구겼다.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은 “진욱이의 비중은 용병인 가빈 슈미트 이상”이라며 “수비, 경기 조율 등 모든 면에서 공백이 크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대한항공은 신예 배구 도사의 활약으로 웃었고, 삼성화재는 현역 최고 배구 도사의 부상으로 고개를 숙인 셈이 됐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대한항공 고공비행의 연료는 미국에서 온 용병 에번 페이택. 그동안 대한항공은 용병으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현대캐피탈이 숀 루니, 삼성화재가 안젤코 추크·가빈 등을 앞세워 우승컵을 들 때 먼발치서 부러워만 했다. 사실 올 시즌에도 큰 기대를 걸진 않았다. 시즌 전 에번은 “덩치가 크고 힘은 좋지만 유연성과 스피드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에반이 지금은 구단으로부터 복덩이 취급을 받는다. 득점 3위(498점), 서브 1위(세트당 서브에이스 0.5개) 등 기록도 기록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가 더 크다. 신 감독은 “일단 수비와 리시브 등 기본기가 좋다. 위기 상황에서 해결사 능력도 갖췄다. 성격도 밝아 팀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까지 한다”며 칭찬했다.
만년 3위의 설움을 벗어내고 정규시즌 정상에 오른 대한항공의 다음 목표는 챔피언결정전 우승이다. 이제 챔피언과 도전자의 처지가 바뀌었다. 대한항공이 다시 한 번 삼성화재, 현대캐피탈의 추격을 뿌리치고 진정 통합 챔피언으로 올라설지 벌써부터 관심이 집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