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시아의 모든 땅은/ 공허 속에서 울부짖는다. 크세르크세스가 초래했도다. 오오!/ 크세르크세스가 파괴했도다. 우우!/ 크세르크세스의 계획은 모두 잘못되었도다.”
-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큐로스 ‘페르시아’(기원전 5c)
그리스 비극 ‘페르시아’에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공격했지만, 너무 큰 자만심으로 신들의 분노를 사 결국 참패한 데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불안이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시아가 유럽의 목소리를 빌려 동양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동양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 것이다.
일본 만행의 주인공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년)는 ‘문명론의 개략’(1875년)에서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세계로 나아가는 것(脫亞入歐)’을 메이지 국가의 목표로 내건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근대화(서구화)했다고 자부한 그는 오리엔탈리즘을 복제해 인류를 문명(유럽)과 야만(아시아)으로 나눈다. 야만의 대표적인 예는 조선 중국 터키 페르시아 등이다. 특히 조선은 “완고, 고루, 편협, 의심 많음, 구태의연, 겁 많고 게으름, 잔혹하고 염치없음, 거만, 비굴, 참혹, 잔인”하다. 조선식민사관과 정체성론으로 유명한 사회경제사학자 후쿠다 도쿠조오는 일본은 서양과 동등한 역사를 거친 반면, ‘특수 중 특수’인 조선은 일본 헤이안 후기(9~10세기)의 사회경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뱅골인의 신체 조직은 여성과 같다고 할 정도로 유약하다. 여러 시대 동안 그는 용감하고 대담한 남자들에게 짓밟혀 왔다. 용기, 독립, 정직 같은 특질들은 그의 체격과 상황에는 한결같이 적합하지 않다.”
-인도를 묘사한 영국인의 글
“더럽고 탁하며 불결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흙덩이 속에서 유유자적 살며 길이가 자기 키의 절반이나 되는 담뱃대를 빨아대면서 하는 일도 생각도 없이 소일하는 한국인을 낙천가의 훌륭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차별한 평등은 결국 악평등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정복해야 할 여성으로 설정했듯, 일본 또한 그렇다. ‘남성=제국주의=지배하는 쪽=일본’과 ‘여성=식민지=지배받는 쪽=조선’이라는 이분법은 성차별에 사로잡힌 서구제국주의 시선과 판박이다. 서양이나 ‘아류 제국주의’ 일본에게 식민지는 성적인 기대, 싫증나지 않는 관능, 질리지 않는 욕망을 도발하는 장소인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과 청 사이에 낀 조선을 “득의양양하게 마음껏 욕구를 채우고도 지칠 줄 모르는 지나(支那·중국을 경멸하는 용어) 남자에게도 아양을 떠는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라고 비유했다. 이렇듯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은 자연스럽게 ‘힘(서구)에 대한 복종과 자발적 동조’라는 두 바퀴의 수레로 세계를 정신적으로 정복한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서양의 동양관을 내면화해 스스로의 문화와 사상을 미신, 비합리, 비과학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면화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엔 힘의 논리, 강자의 억압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 작용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은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서구에 의해 재구성된 ‘우리’의 모습이겠지요.”
-김용석 대담집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한양대 2002년 정시
서양인들은 동양의 불상경배와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나 미신으로 여기면서도, 굴뚝 타고 강림하는 산타할아버지 풍습이나 ‘물 세례의식’은 세련된 종교의식으로 치부한다. 서양 것을 표준으로 삼는 근대화는 서양은 우월, 동양은 열등하다는 근대화 공식을 만들었고 우리는 우리를 부정한다. 양식(洋食), 양복(洋服), 양옥(洋屋)은 모더니티이지만 한식, 한옥, 한옥은 낡은 것이다. 결국 서양을 닮고 싶고 동양과는 다르고 싶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욕망은 서구에 대해서는 콤플렉스를, 다른 동양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필시/ 그 나라 농촌이나 빈민 가정의/ 처녀를 꾀어 와서/ 소개비 챙기고 물건처럼 팔아넘기는 것이리/ 말도 통하지 않고/ 고향과도 아득한 만리타국에서/ 그녀들이 흘릴 눈물의 시간/ 생각해본다/ 왜 우리는 나라의 자존 돌보지 않나/ 지난날 그렇게도 베트남 전체 민중에게/ 피눈물 고통 주었는데…. -이동순(영남대 국문과 교수) ‘눈물의 시간’
“한국 좋아서/ 이 나라 왔습니다/ 하지만 한국 회사 사장은/ 날이 갈수록 인간 얼굴 아닙니다/ 일하는 시간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 달 월급 밀렸는데/ 월급 이야기 꺼내면 큰소리로 펄펄 뛰면서/ 발로 차고 뺨까지 때렸습니다/ 사장은 불법노동자로 고발하겠다고/ 도리어 으르렁거립니다/ 한국 좋아서 왔는데/ 이젠 이 나라가 더 이상 좋지 않습니다….” -이동순 ‘베트남 노동자’(‘미스 사이공’)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복제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추종주의와 ‘대한민국 우월주의(닫힌 민족주의)’라는 하얀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한국 업체에 고용된 동남아 출신 근로자들에게는 인권유린, 저임금, 인종차별적인 비아냥거림과 욕설이 하나의 통과의례다. 텔레비전 토크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서 베트남 여성 흐엉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도망가지 않아요. 친절상담’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볼 때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나, 일본에 대한 피해를 기억의 서사로 쓰려 하면서도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우리의 미온적 태도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의 한 단면이다.
소설 ‘정글북’(키플링), ‘소공녀’(프랜시스 버넷) 등이 그린 ‘비합리, 혼돈, 열등, 무지몽매, 비위생적, 이국적, 게으르고 더러운’ 인도 이미지는 ‘남성’인 영국이 ‘여성’인 인도를 정복하고 싶어 ‘이분화한 제국주의의 시선(오리엔탈리즘)’으로 상상해낸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이어받은 셈이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이옥순은 이를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른다. 류시화 강석경 송기원 황지우 김영현 등이 깨달음을 위해 떠난 인도에서 그 나라의 절대빈곤을 명상의 한 방법으로만 보고, 인도 하층민을 성자로 그린 시선이 좋은 예라고 비판한다. 100년 전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오리엔탈리즘의 눈으로 인도를 본 것처럼, 우리가 설정한 타자(다룬 동양)의 가난과 고단한 삶을 고통 없이 구경하는 시선은 백인들에게는 친근함을 느끼면서도 네팔 인도 베트남 방글라데시의 ‘가무잡잡한’ 외국인들은 어쩐지 우리와 다르다고 느끼는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나 다름없다.
결국 오리엔탈리즘의 완성은 자발적 동조이고, 가장 세련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미학적으로 신비화하는 지점에서 교묘하게 작동한다. 할리우드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가 사무라이를 ‘무사도’라는 프리즘으로만 다룬 채 그 안에 담긴 권위주의와 폭력을 숨긴다든지,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이 라마교에 은둔과 고요의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티베트를 번뇌 없는 피안(彼岸)의 땅으로 그린 채 종교적 갈등과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배제한 것이 좋은 예다.
이러한 미학적 신비화는 동양은 비합리적, 비정상적,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서양에 늘 오리엔테이션을 받아야 ‘서구처럼’ 합리적, 도덕적, 정상적으로 문명화된다는 훈육이다. 우리 또한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을 이식해 ‘황색피부 위에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채, 다른 황색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우스꽝스러운 자기분열증’인 복제 오리엔탈리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 추천 도서 :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옥순 지음·푸른역사 펴냄)
-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큐로스 ‘페르시아’(기원전 5c)
그리스 비극 ‘페르시아’에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공격했지만, 너무 큰 자만심으로 신들의 분노를 사 결국 참패한 데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불안이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시아가 유럽의 목소리를 빌려 동양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동양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 것이다.
1_ 오리엔탈리즘의 일단을 드러낸 영화 ‘정글북’.<br>2_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br>3_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의 저자 강상중 도쿄대 교수.<br>4_ 이옥순의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br>
“뱅골인의 신체 조직은 여성과 같다고 할 정도로 유약하다. 여러 시대 동안 그는 용감하고 대담한 남자들에게 짓밟혀 왔다. 용기, 독립, 정직 같은 특질들은 그의 체격과 상황에는 한결같이 적합하지 않다.”
-인도를 묘사한 영국인의 글
“더럽고 탁하며 불결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흙덩이 속에서 유유자적 살며 길이가 자기 키의 절반이나 되는 담뱃대를 빨아대면서 하는 일도 생각도 없이 소일하는 한국인을 낙천가의 훌륭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차별한 평등은 결국 악평등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정복해야 할 여성으로 설정했듯, 일본 또한 그렇다. ‘남성=제국주의=지배하는 쪽=일본’과 ‘여성=식민지=지배받는 쪽=조선’이라는 이분법은 성차별에 사로잡힌 서구제국주의 시선과 판박이다. 서양이나 ‘아류 제국주의’ 일본에게 식민지는 성적인 기대, 싫증나지 않는 관능, 질리지 않는 욕망을 도발하는 장소인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과 청 사이에 낀 조선을 “득의양양하게 마음껏 욕구를 채우고도 지칠 줄 모르는 지나(支那·중국을 경멸하는 용어) 남자에게도 아양을 떠는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라고 비유했다. 이렇듯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은 자연스럽게 ‘힘(서구)에 대한 복종과 자발적 동조’라는 두 바퀴의 수레로 세계를 정신적으로 정복한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서양의 동양관을 내면화해 스스로의 문화와 사상을 미신, 비합리, 비과학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면화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엔 힘의 논리, 강자의 억압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 작용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은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서구에 의해 재구성된 ‘우리’의 모습이겠지요.”
-김용석 대담집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한양대 2002년 정시
서양인들은 동양의 불상경배와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나 미신으로 여기면서도, 굴뚝 타고 강림하는 산타할아버지 풍습이나 ‘물 세례의식’은 세련된 종교의식으로 치부한다. 서양 것을 표준으로 삼는 근대화는 서양은 우월, 동양은 열등하다는 근대화 공식을 만들었고 우리는 우리를 부정한다. 양식(洋食), 양복(洋服), 양옥(洋屋)은 모더니티이지만 한식, 한옥, 한옥은 낡은 것이다. 결국 서양을 닮고 싶고 동양과는 다르고 싶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욕망은 서구에 대해서는 콤플렉스를, 다른 동양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필시/ 그 나라 농촌이나 빈민 가정의/ 처녀를 꾀어 와서/ 소개비 챙기고 물건처럼 팔아넘기는 것이리/ 말도 통하지 않고/ 고향과도 아득한 만리타국에서/ 그녀들이 흘릴 눈물의 시간/ 생각해본다/ 왜 우리는 나라의 자존 돌보지 않나/ 지난날 그렇게도 베트남 전체 민중에게/ 피눈물 고통 주었는데…. -이동순(영남대 국문과 교수) ‘눈물의 시간’
“한국 좋아서/ 이 나라 왔습니다/ 하지만 한국 회사 사장은/ 날이 갈수록 인간 얼굴 아닙니다/ 일하는 시간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 달 월급 밀렸는데/ 월급 이야기 꺼내면 큰소리로 펄펄 뛰면서/ 발로 차고 뺨까지 때렸습니다/ 사장은 불법노동자로 고발하겠다고/ 도리어 으르렁거립니다/ 한국 좋아서 왔는데/ 이젠 이 나라가 더 이상 좋지 않습니다….” -이동순 ‘베트남 노동자’(‘미스 사이공’)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복제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추종주의와 ‘대한민국 우월주의(닫힌 민족주의)’라는 하얀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한국 업체에 고용된 동남아 출신 근로자들에게는 인권유린, 저임금, 인종차별적인 비아냥거림과 욕설이 하나의 통과의례다. 텔레비전 토크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서 베트남 여성 흐엉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도망가지 않아요. 친절상담’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볼 때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나, 일본에 대한 피해를 기억의 서사로 쓰려 하면서도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우리의 미온적 태도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의 한 단면이다.
소설 ‘정글북’(키플링), ‘소공녀’(프랜시스 버넷) 등이 그린 ‘비합리, 혼돈, 열등, 무지몽매, 비위생적, 이국적, 게으르고 더러운’ 인도 이미지는 ‘남성’인 영국이 ‘여성’인 인도를 정복하고 싶어 ‘이분화한 제국주의의 시선(오리엔탈리즘)’으로 상상해낸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이어받은 셈이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이옥순은 이를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른다. 류시화 강석경 송기원 황지우 김영현 등이 깨달음을 위해 떠난 인도에서 그 나라의 절대빈곤을 명상의 한 방법으로만 보고, 인도 하층민을 성자로 그린 시선이 좋은 예라고 비판한다. 100년 전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오리엔탈리즘의 눈으로 인도를 본 것처럼, 우리가 설정한 타자(다룬 동양)의 가난과 고단한 삶을 고통 없이 구경하는 시선은 백인들에게는 친근함을 느끼면서도 네팔 인도 베트남 방글라데시의 ‘가무잡잡한’ 외국인들은 어쩐지 우리와 다르다고 느끼는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나 다름없다.
결국 오리엔탈리즘의 완성은 자발적 동조이고, 가장 세련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미학적으로 신비화하는 지점에서 교묘하게 작동한다. 할리우드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가 사무라이를 ‘무사도’라는 프리즘으로만 다룬 채 그 안에 담긴 권위주의와 폭력을 숨긴다든지,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이 라마교에 은둔과 고요의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티베트를 번뇌 없는 피안(彼岸)의 땅으로 그린 채 종교적 갈등과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배제한 것이 좋은 예다.
이러한 미학적 신비화는 동양은 비합리적, 비정상적,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서양에 늘 오리엔테이션을 받아야 ‘서구처럼’ 합리적, 도덕적, 정상적으로 문명화된다는 훈육이다. 우리 또한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을 이식해 ‘황색피부 위에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채, 다른 황색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우스꽝스러운 자기분열증’인 복제 오리엔탈리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 추천 도서 :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옥순 지음·푸른역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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