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 ‘자화상’(왼쪽).윤유진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던데…’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시절에는 참으로 많이, 그리고 쉽게 그린 그림이 자신이나 가족의 얼굴이었다. “자, 자기 얼굴을 한번 그려보세요”라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장군이나 공주가 된 자신의 모습을 쓱쓱 잘도 그린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자화상 그리기는 더 이상 쉽지도 즐겁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꿈을 잃어버린 스스로를 새삼 확인하는, 괴롭고도 껄끄러운 작업이 될 것이다.
아마 이 같은 느낌은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열네 명 화가들이 자화상을 내놓은 성곡미술관의 ‘I, You, Us’ 전에 더욱 관심이 간다. 화가가 본 자기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귀를 붕대로 싸맨 고흐의 자화상처럼 원망스러운 듯, 꿈꾸는 듯한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까. 아니면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린 초상처럼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들리지 않는 괴성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화상(Self-portrait)’은 스스로를 그린 그림이지만 사실상 작가가 그린 그림은 다 자화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작품은 자신의 자아를 표현한 수단이니까요.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석고 데생을 그리라고 하면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그려내는 것도 그 같은 이유 때문이죠.”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성곡미술관 신정아 수석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송하나 ‘자아실현…’
“이번 전시의 주제는 ‘인간의 내면’입니다. 작가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궁금증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했어요. 흔히 어른들이 ‘생긴 대로 산다’고 하시는 것처럼, 얼굴에서 느껴지는 한 사람의 역사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또 과거와는 달리 현대미술의 자화상은 얼굴뿐만 아니라 신체의 여러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지요.”
먼저 눈에 띄는 작품들은 역시 젊은 작가들의 재기발랄함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그들의 캔버스는 마치 은밀한 고백을 담은 일기장 같다. 아직 대학생인 작가 고정민(31)의 자화상은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체리’다. “무의식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면 늘 ‘체리’가 나오곤 한다. 그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동생, 오빠, 아빠이자 또 다른 나인 다중인격체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말 대신 표정과 행동으로 대답하는 체리를 통해 작가는 또 다른 자신을 들여다본다.
김홍주 ‘거울’.고정민 ‘아픔’.김진정 ‘마스크’(왼쪽부터)
송하나와 같은 나이인 윤유진의 자화상은 또 어떤가. 그는 스스로를 아예 오징어로 변신시켜 놓았다.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세 마리 오징어를 나란히 붙인 연작의 제목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던데…’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자못 심각한 제목과는 달리 절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젊은 작가가 본 세상은 제목처럼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머러스하고 밝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나이든 작가들의 자화상에는 한결같이 어두움이 깃들어 있다. 우울한 자화상이 보여주는 것은 감정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초상인 듯싶다. 부산에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온 김진정(36)은 한지 위에 표정 없는 ‘마스크’를 그렸다. 코와 귀만 선명한 그의 자화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둠에 차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눈이다. 황규태(65)의 사진은 아예 스스로의 머리에 피스톨을 들이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중견들의 작업에서는 진지함이 돋보인다. 줄기차게 자화상을 그려온 작가 권여현(43)은 특이하게 ‘집단초상화’를 내놓았다. 작가가 예수의 모습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열두 명의 제자가 각각 한 명씩 예수의 제자 복장을 한 자화상을 그렸다. 작가는 “나의 자화상에 이르는 길을 인자들과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한다. 또 김차섭(41)은 세계지도 위에 교복을 입은 학창시절의 자신을 그려넣은 자화상으로 젊은 날의 꿈을 되살렸고 김홍주(38)는 거울 속의 자신을 그린 듯, 극사실주의로 재현한 차분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자화상은 가장 흔한 소재 중 하나지만 의외로 많이 그려지지는 않았어요. 그만큼 자신을 리얼하게 표현해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일 겁니다.” 신정아 큐레이터의 말처럼 쉬운 주제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주제, 작가들의 자아가 전시장에서 소곤대고 있다. 그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은 그림과 사진, 비디오 설치작업 사이에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작가들이 그려낸 것은 젊고 늙고 발랄하고 진지한, 현대인의 얼굴 그대로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