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반 전인 93년 5월28일.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이었던 김태정 전 법무장관은 검찰 선배인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 구속사실을 발표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아무리 개인적인 정을 앞세워서는 안된다고 다짐했지만 이런 일만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직 고검장 구속’이라는 검찰사상 초유의 일을 자신의 손으로 치러낸 탓인지 그는 북받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로부터 5년8개월이 지난 올해 2월1일 김전장관은 대국민사과문을 읽어내리면서 또다시 눈물을 훔쳐야 했다. 검찰총수로서 대전법조비리사건에 연루된 후배검사의 사표를 받아내고 조사해야 했던 괴로움을 그는 눈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2월4일 김전장관은 자신이 검찰 후배들의 손에 의해 차디찬 구치소의 1.1평짜리 독방에 갇히게 되는 정반대의 상황에 빠졌다.
검찰 인사들은 하나같이 그를 두고 ‘파란만장한 풍운아’라고 말한다. 검사생활 30년 동안 그의 주변에는 늘 파란이 그치지 않았고 보름간의 짧은 법무장관직을 끝으로 검사생활을 마감한 올해에는 영광과 치욕을 동시에 맛보았기 때문이다.
평검사 시절 8년 동안 시골의 지청만 돌 정도로 ‘정의롭지만 별 볼일 없는’ 검사였던 김전장관은 김석휘 전 법무장관의 눈에 띄어 82년 대검중수부과장으로 발탁된 뒤 검찰내 특수통으로 승승장구했다. 94년 9월 검찰 간부인사에서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서울지검장에 입성하지 못하고 부산지검장으로 밀려나면서 분루를 삼켜야 했던 그는 97년 8월 마침내 호남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검찰총수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파란은 다시 시작됐다.
검찰총장이 된 지 3개월만에 그는 한나라당의 DJ비자금 자료 폭로에 대해 수사유보결정이라는 결단을 내려야 했고 김영삼전대통령에 이어 김대중대통령에게서도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렇지만 지난 1월 대전법조비리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후배검사들로부터 총장직 사퇴를 요구받았다. 지금도 많은 검사들은 당시와 옷로비 의혹이 불거졌을 때를 떠올리며 “김전장관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놓쳤다”고 말한다. “그때 마음을 비우고 훌훌 검찰을 떠났다면 검찰사에 영원히 남는 영웅이 돼있을텐데…”라며 아쉬워한다.
그로서는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라는 억울한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구속되기 한달여전쯤 사석에서 “솔직히 장관을 오래하고 싶었다”고 밝히면서 당시 자신이 ‘자리’에 집착했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는 또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집 근처에서 조깅할 때 여자들이 알아보고 ‘힘내세요’라고 격려하더라. 이들은 집사람은 밉지만 나를 사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며 당당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영욕이 극명하게 교차했던 99년은 가장 긴 한 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짧은 비상과 날개없는 추락은 ‘산의 정상을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어렵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