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어른은 고향에 연연하지 않는다. 고향에만 머물고 싶어 한다면 그는 여전히 아이거나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영화 ‘스노든’의 마지막 장면, “스노든은 어떻게 될 것이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꽤나 책임 있어 보이는 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러시아에 묻히게 될 것이다. 고향에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스노든은 이 말을 듣고 생각했을 테다. 고향에 돌아가기를 바랐다면,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아이와 굿모닝 키스를 나누는 그런 삶을 바랐다면 애당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 영화 속 스노든은 미국 정부가 테러 방지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적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고 폭로해 세계적 파문을 일으킨 전직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이다.
흔히 현대전은 정보전이라고 한다. 영화는 바로 그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한 CIA 요원은 “옛날 같으면 근육질 군사학교 졸업생들이 앉아 있을 자리에 모범생이 가득하다”는 농담을 던진다. 천재 해커들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드론으로 확인하면서 건물에 폭탄을 쏟아부으며, 마치 컴퓨터 속 캐릭터처럼 폭발 구름 속에서 먼지가 되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곳, 그곳이 바로 CIA 수뇌부다. 이곳에서 외국어 몇 개는 기본이고 수화까지 할 수 있는 천재 CIA 요원들이 모여 하는 일이 정보 수집이다. 문제는 그 정보의 범위와 수준이 어디까지냐다.
우리는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개인의 사생활 전부가 노출되는 위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컴퓨터, 온라인 검색 및 결제 같은 과정을 통해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디지털 지문을 남긴다. 부지불식간에 네트워크에 침입하는 악성코드는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의 동의하에 수집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은 보안, 안보 같은 윤리적 문제 혹은 정치와 만나 실효적 위험으로 변질된다. 안보를 위한다는 이유로 영장 없이 개인정보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테러리스트로 지목하면 그와 연계된 수많은 사람, 즉 소셜미디어 속 친구나 전화번호부 속 인물, 그와 문자메시지 혹은 e메일을 주고받는 불특정다수가 모두 사찰 대상이 된다.
스노든은 이렇듯 무방비로 확장돼가는 디지털 감찰과 사찰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후 스스로 예상했듯 그는 미국의 ‘공공의 적’이 됐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영화는 일전에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된 스노든의 이야기를 좀 더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민 건 아니다. 전작보다 좀 더 설득력 있고 긴장감 넘치는 서사 구조를 갖췄다는 의미다.
개인정보 유출은 이제 너무 흔하게 발생해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만성적 위험이 되고 말았다. 현대인 누구나 개인정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이 실제적이거나 금전적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둔감성은 디지털 정보에 멋대로 접근하고 그 정보를 마음대로 쓰는 감시 주체들에게도 해당된다. 관음증을 애국심으로 변명하는 경우도 숱하다.
영화 ‘스노든’은 개인정보 유출에 만성적으로 둔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유형의 재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말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개인은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사실을 노출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이 당연한 권리가 이념과 안보라는 명목하에 침해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먼 나라 미국의 이야기지만 결코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매우 사소한 것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