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거목 장욱진(1918~ 90) 화백이 34세 때 그린 자화상입니다. 저는 20년 전 장 화백의 유가족 집에서 처음 이 작품을 보고 놀랐습니다. 먼저 그림이 너무 작아서 놀랐고, 그 작은 그림 속에 있을 것은 다 있어서 놀랐습니다. 작품은 볼펜 길이 또는 엽서 크기입니다. 아마 작가가 평생 제작한 작품 가운데 가장 작은 크기일 것입니다. 작가는 키가 큰 편이었으나 작품을 그릴 때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쪼그리고 앉아서 작업했다고 합니다. 작품 크기가 대부분 50cm 미만인 것도 그런 이유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간단명료한 화풍으로 장 화백의 작품은 ‘작지만 큰 그림’이라 불립니다.
황금물결을 배경으로 화면 하단부에 검은색 연미복을 입고 있는 신사가 바로 작가 자신입니다. 단정하게 가르마를 타고 콧수염을 기른 장욱진은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을 입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맑은 대낮에 농촌 들판 한가운데에 등장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사복과 우산은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합니다.
장 화백이 이 그림을 그린 것은 6·25전쟁이 터진 이듬해인 1951년 가을입니다. 일명 ‘보리밭’이라 부르는 작품이지만 사실 계절이 가을이어서 보리가 아닌 벼가 익는 풍경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황금빛 들판 가운데로 붉은 흙빛의 길이 세로 방향으로 명료하게 나 있습니다. 무르익은 벼들은 짧게 끊어 터치한 듯한 붓질로 생동감이 더해졌습니다. 장욱진의 뒤를 따르는 강아지는 그의 작품에 수시로 등장하는 단골손님으로 엉뚱함과 해학성을 높여줍니다. 전쟁 통인데 작가는 한가롭게 들판을 거닐고, 새 네 마리는 평화롭게 줄지어 날며, 구름은 두둥실 떠다닙니다. 도대체 작가는 왜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상황을 그렸을까요?
전쟁이 터지자 장 화백은 종군화가단에 들어가 중부전선에서 활동했습니다. 이 무렵 이중섭, 김환기 등 작가 다수가 종군화가로 근무했고, 박수근도 주한미군과 친해지면서 컬렉터들을 만나게 됩니다. 장 화백은 이때 그린 작품을 ‘전쟁미술전’에 출품해 ‘종군작가상’을 받았습니다. 흔히 동심의 세계, 꿈과 환상의 세계를 그리며 도인, 문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장 화백이 종군작가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워서 이 시기 작품들을 조사해봤지만 아쉽게도 전해지는 작품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쟁을 몸소 체험한 장 화백은 아내의 권고로 고향인 충남 연기군으로 귀향합니다. 세종시로 바뀐 그림 속 들판은 지금 어떻게 됐을지 궁금합니다. 한편,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먹고사는 것조차 힘든 현실에서 그는 캔버스를 구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장 화백은 여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무사시노대에 유학했고, 한국의 대단한 명문가의 처자와 혼인한 당대 엘리트였지만, 전쟁의 고통과 궁핍한 현실은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그는 캔버스 대신 종이나 목판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종이 위에 석유로 갠 물감으로 그린 이 작품은 이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비슷한 시기 이중섭은 담배 은박지에, 박수근은 나무판에 그린 그림을 남겼습니다.
이 자화상은 전쟁의 무질서와 혼란, 피난 시절의 가난, 고독과 외로움에 지친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은 패러독스가 고스란히 표현된 작품입니다. 풍요로운 들판이 궁핍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줍니다. 세상은 불안하고 혼란스럽지만 새들은 줄지어 평화롭게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화면 속 이러한 분위기는 낭만성을 넘어서 강한 해학성마저 느끼게 해줍니다. 전쟁의 흔적 대신 목가적이고 해학적인 화풍은 훗날 1970~80년대 전개될 그의 화풍을 충분히 예감케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