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gilvy]
오길비가 제작한 광고는 워낙 전설적인 것이 많지만 대표적인 광고 2가지만 소개하겠다. 하나는 시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사적인 것이다. 시적인 광고는 사람의 의표를 찔러 아찔하게 만들고, 서사적인 광고는 사람의 상상력이 달음질할 수 있도록 풀무질을 해준다.
시적 광고 vs 서사적 광고
1960년 오길비의 롤스로이스 지면 광고(왼쪽)와 1951년 해서웨이 셔츠 지면 광고. [ⓒRolls Royce, ⓒHathaway]
사람들이 대부분 엔진 마력이나 순간가속도 같은 자동차의 기계적 성능에 집중할 때 오길비는 그 기계의 텅 빈 공간을 채우는 ‘소리’를 떠올렸다. 이를 통해 소비자에게 2가지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줬다. 제품이 뭘 하느냐 못지않게 뭘 하지 않느냐도 중요하다는 것과 자동차라는 기계가 아니라 그 안에서 고독하게 운전하는 사람에게로 관심을 돌린 것이다. 이 광고의 집행비는 2만5000달러(약 2932만5000원)에 불과했지만 경쟁사인 미국 포드사로 하여금 자사 자동차의 소음이 적다는 것을 알리는 데 수억 달러를 쓰게 만들었다.
반대로 서사적인 광고의 대명사는 1951년 ‘뉴요커’지에 실린 해서웨이 셔츠의 지면 광고를 꼽을 수 있다. 엉뚱하게도 고급스러운 해서웨이 드레스셔츠를 입은 귀족 풍모의 남자 모델에게 검은 안대를 씌웠다. 그러고는 ‘해서웨이 셔츠를 입은 남자(The man in the Hathaway shirt)’라는 제목 아래 해서웨이 셔츠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광고 문장을 길게 달았다. 하지만 그 광고 문장 어디에도 남자 모델이 왜 안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남자 모델이 한쪽 눈을 잃은 이유에 대한 상상은 광고를 보고 호기심에 가득 찬 소비자의 몫으로 넘겨졌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부상을 입은 걸까, 사냥하다 맹수의 습격을 받은 걸까, 러시아 혁명 와중에 눈을 잃고 미국으로 망명한 귀족은 아닐까. 이렇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광고 효과는 실로 엄청나, 미국 메인주의 작은 셔츠 제조사로 경영난에 처했던 해서웨이는 재고가 일주일 만에 바닥났고 그해 매출이 3배나 뛰었다. ‘브랜드 이미지 광고’의 효시로 불리는 이 광고는 광고 자체로뿐 아니라 ‘타임’ ‘포천’ ‘라이프’ 같은 잡지에서 분석기사의 대상이 돼 더 유명해졌다.
특히 ‘타임’은 오길비에게 ‘크리에이티브의 제왕’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0세기 후반 광고마케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확산과 더불어 오길비와 그가 세운 세계적인 광고대행사 오길비의 명성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광고계 ‘아싸’가 ‘인싸’ 중 ‘인싸’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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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창대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성적 부진으로 2년 만에 중퇴하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마제스틱호텔의 주방보조가 됐다. 그것도 1년뿐, 일주일에 65시간씩 일하는 것에 지쳐 아버지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아가 쿠커’라는 부엌스토브업체의 방문판매자가 됐다. 직접 발로 뛰면서 마케팅 세계에 눈뜬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아가 쿠커 판매의 이론과 실제’라는 소책자를 만들었다.
30년 뒤 ‘포천’이 ‘역사상 최고의 판매교본’으로 선정한 이 책이 발판이 돼 그는 당시 형 프랜시스가 다니던 런던 한 광고대행사에 취업한다.
거기서 광고의 맛을 알게 된 오길비는 당시 광고 분야 최고 선진국이던 미국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업계 경험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취업이 안 됐다. 결국 1938년 간신히 여론조사 전문회사 갤럽에 들어가 3년간 400건 이상의 여론조사를 진행하면서 훗날 오길비 광고의 토대가 될 치밀한 시장조사와 소비자 심리연구의 노하우를 확립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정보분석관으로 일하다 종전 후엔 펜실베이니아주 농장에서 3년간 농사도 지어봤으나 그의 천직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봄날을 맞아 길을 가다 ‘저는 눈이 멀었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구걸하는 사람을 만났다. 돈 통은 텅 비어 있었다. 오길비는 그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종이에 쓰인 글을 바꿔줬다. 그러자 돈 통은 금방 찼다. 바뀐 글은 이랬다. ‘봄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1948년 자신의 소명에 따라 2명의 파트너와 함께 뉴욕에 광고회사를 차리고 오길비 신화를 창조하게 된다. 오길비는 사실과 원칙에 충실한 ‘과학적 광고’를 주창한 클로드 C. 홉킨스(1866~1932)를 ‘아버지’로, 냉철한 시장조사와 창의적 영감을 결합시킨 레이먼드 루비캄(1892~1978)을 ‘어머니’로 삼아 20세기 광고 혁신을 이뤘다. 거짓말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실질적인 판매 향상으로도 직결되는 광고를 과학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는 일이었다. 쉽게 말해 감언이설, 허위, 과장, 약장사 같은 연관어로부터 광고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오길비는 이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투입했다. 일례로 해서웨이 셔츠의 광고를 맡았을 때 그는 116년 된 이 회사의 역사와 제품, 고객에 대한 심층 조사를 토대로 18개나 되는 광고 콘셉트를 구상했고, 최종적으로 하나를 고른 것이 ‘해서웨이 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원칙에도 충실했다. 롤스로이스 광고가 히트해 롤스로이스 판매가 급증했지만 미국에서 판매된 500대에서 기계적 문제가 발생하자 바로 광고를 중단했다. ‘광고는 소비자와 약속’이라고 믿는 자신의 신념에 위반됐기 때문이다.
후배 광고인의 등불이 되다
오길비의 광고는 광고마케팅 교재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가 광고한 제품보다 그의 광고가 더 유명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제품 판매와 직결되지 않는 ‘광고를 위한 광고’를 철저히 경계했다. “광고는 재미보다 설득을 위한 것이다. 무조건 팔아라”라는 그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 그는 이를 위해 광고인이 제조자보다 제품에 대해 더 많이,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는 멍청이가 아니다. 바로 당신의 아내다.”사실 오길비의 성공은 철저히 무명이던 존재가 갑자기 빛을 발하며 등장해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다는 점에서 다윗왕이나 아서왕의 전설에 비견할 만하다. 하지만 다윗이나 아서는 그 자신의 성공방식에 취해 폭주하다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오길비는 이와 다른 길을 걸었다. 광고업계에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 광고인들에게 전수해주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30년 광고 인생의 노하우를 결집한 신입사원 교재 ‘마법의 손전등(Magic Lanterns)’이나 ‘어느 광고인의 고백’(1963),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1978), ‘광고 불변의 법칙(Ogilvy on Advertising·1983)’ 같은 책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오길비가 직원에게 선물했던 러시아 인형. [ⓒOgilvy]
1948년 그가 세운 광고회사는 단 하나의 클라이언트도 없는 난쟁이 회사로 시작했지만 10년 만에 세계적인 광고회사로 우뚝 섰다. 창업 70주년을 맞은 2018년, 다른 창업자들의 이름을 다 떼고 ‘오길비’로 개명한 이 회사는 지금도 83개국에 132개 지사를 갖춘 거인들의 회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