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주 KEB하나은행장(상자 안)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금융당국의 채용비리 조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동아DB, 뉴시스]
하나은행 측은 5월 30일 함 행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일단 법원 판단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내심 현직 행장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에 휩싸였다.
함 행장 외에도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과 박인규 전 DGB금융지주 회장 겸 대구은행장은 자리에서 물러난 직후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지난해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성세환 전 BNK금융지주 회장 겸 부산은행장에게도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을 합치면 1년여 동안 은행장 4명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성세환 전 회장은 경남은행 인수를 위해 2015년 11월 유상증자를 하고 이 과정에서 폭락한 주가를 회복하고자 거래 기업에 자사 주식 매수를 유도한 혐의(‘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로 지난해 4월 구속 기소됐다. 결국 올해 1월 징역 1년6월에 벌금 7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보석 상태였던 성 전 회장은 법정구속은 피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4월에는 부산은행 채용비리에 개입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박인규 전 회장은 5월 중순, 채용비리와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는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각종 채용 절차에서 점수 조작 등의 방법으로 24명을 부정채용하고 지난해 11월 담당자들에게 인사부 컴퓨터 교체와 채용서류 폐기 등을 지시한 혐의다. 또 2014년 4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속칭 ‘상품권깡’ 수법으로 비자금 8000여만 원을 조성한 혐의도 받고 있다. 앞서 검찰은 4월 박 전 은행장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대구은행은 박 전 회장의 후임으로 뽑힌 김경룡 행장 내정자까지 채용비리에 휩싸이면서 잇따른 ‘수장 공백’을 맞게 됐다. 대구은행 이사회는 채용비리 의혹이 해소된 뒤 후임 행장을 선정하기로 해 경영 공백이 장기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김 내정자는 2013년 경산지역 담당 본부장을 지내면서 경북 경산시금고를 유치하려고 담당 공무원 아들을 부정채용하는 데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공무원의 자녀는 2014년 대구은행에 입행했다.
금융당국의 수사에 금융계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현직 은행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20여 년 만에 처음이기 때문이다. 1997년 발생한 한보철강 대출비리 사건 때가 마지막이었다. 더욱이 구속영장이 청구된 성 전 회장과 박 전 회장, 이 전 회장 모두 전 정부와 각별한 인연으로 회자된 인물들이었다. 이 때문에 일련의 상황을 정권교체 시기마다 일어나는 ‘은행장 수난’으로 해석하는 이가 많다.
쑥대밭’ 된 금융권
채용비리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금융권 최고경영자들. 성세환 전 BNK금융지주 회장 겸 부산은행장(왼쪽), 박인규 전 DGB금융지주 회장 겸 대구은행장. [뉴시스]
법원은 “혐의를 다툴 여지가 있다”며 함 행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곽형섭 서울서부지방법원 영장전담판사는 “피의사실에 다툴 여지가 있고, 현재까지 확보된 증거자료와 피의자가 수사에 임하는 태도 등 모든 사정을 고려하면 피의자에 대한 구속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법원의 기각 사유를 보면 아직까지 검찰이 함 행장의 채용비리 관여에 대한 핵심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또한 그동안 하나금융지주에 대한 정권의 외압 논란이 있어왔던 터라 함 행장의 구속 여부를 ‘금감원과 금융사의 자존심 대결’로 바라보는 시각도 적잖다. 현재 은행권에서는 ‘하나은행이 금감원의 권위에 도전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3월 하나금융지주 차기 회장 선출을 앞두고 금감원이 지배구조 문제를 제기했을 때 윤종남 당시 하나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이 ‘관치’라고 반발하며 금감원과 대립각을 세운 것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앞서 금융당국은 지난해 말부터 금융지주 회장들의 이른바 ‘셀프 연임’을 비판하면서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의 3연임을 사실상 반대했다. 급기야 금감원은 1월 하나금융지주의 차기 회장을 뽑는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 절차를 미뤄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하나금융지주 회추위와 이사회는 계획대로 일정을 치러 김 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추대했고 3연임에 성공했다.
오히려 금감원은 그 과정에서 역공을 맞았다. 최흥식 금감원장이 5년 전 채용비리 혐의에 휩싸여 낙마한 것. 최 전 원장은 2013년 하나금융지주 사장 시절 친구 아들을 하나은행 채용 과정에서 추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내용들은 하나금융 내부자가 아니면 알기 어렵다는 점에서 ‘하나금융 배후설’까지 등장했다. 이 일로 김정태 회장의 3연임을 놓고 금융당국과 하나금융지주가 기 싸움을 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금감원 조사 강도 약해질까, 세질까
금융계에서는 “반년 넘게 이어진 채용비리 수사에 은행권이 쑥대밭이 됐다”며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동아DB, 뉴스1]
반면 금감원의 압박이 계속되리란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 금감원의 입지가 크게 위축돼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란 분석이다. 대표적으로 금감원이 6월 4일부터 하나금융과 하나은행을 상대로 진행 중인 ‘경영실태평가’를 들 수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경영실태평가의 강도가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심지어 이를 통해 금융당국이 채용비리와 지배구조 관련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경영실태평가에 착수하기 전부터 금감원 내에서는 ‘최고 인재들로 드림팀을 구성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하지만 하나은행 측은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경영실태평가는 2년에 한 번씩 통상적으로 받는 조사에 불과하다. 이미 금감원 측에서도 경영실태평가와 채용비리 건은 무관하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고 말했다.
경영실태평가는 은행의 경영 전반을 들여다보는 조사로 통상 자본, 자산 건전성, 경영관리, 수익성, 유동성 등을 살펴본다. 단 경영실태평가 항목 선정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금감원이 조사 범위를 어디까지 확대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함 행장에 대한 불구속 수사가 진행된다 해도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최고경영자(CEO) 리스크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검찰이 추가 증거 자료를 확보한 뒤 다시 함 행장에 대한 영장을 청구할 수도 있다. 실제로 박인규 전 회장은 경찰과 검찰이 총 3차례에 걸쳐 영장을 신청한 끝에 구속됐다.
함 행장의 구속영장 재신청 여부는 검찰의 은행권 채용비리 수사 결과 발표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검찰은 6·13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나는 6월 중순쯤 해당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관건은 ‘검찰의 칼끝이 과연 어디까지 향할 것인가’다. 최근 함 행장은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해 “김정태 회장의 지시는 없었다”고 강조했지만 검찰은 5월 29일 김 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두케 했다.
다른 주요 시중은행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KB국민·신한·우리은행 등 4대 은행 모두 채용비리와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국민은행은 당시 국민은행장을 겸하던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채용비리 의혹에 연루돼 난감한 상황이다.
윤 회장은 증손녀가 채용 과정에서 서류전형과 1차 면접에서 최하위권에 들었다 2차 면접에서 최고 등급을 받아 4등으로 합격했다는 특혜채용 의혹을 받고 있다. 이에 검찰은 3월 윤 회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데 이어 5월 9일 윤 회장을 검찰에 소환, 조사했다.
지난해 12월 금감원의 은행권 채용비리 조사에서 비리행위가 적발되지 않았던 신한은행도 최근 전·현직 임원 자녀들의 ‘특혜채용’ 혐의가 발견되면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올해 5월 초 금감원은 신한금융 채용비리 의혹 조사 결과 총 22건의 특혜채용 정황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신한은행에서만 12건의 채용비리 정황이 드러났고, 신한카드 4건, 신한생명 6건이 발견됐다는 것.
마음 조급해진 금감원
금융감독원장의 잇따른 낙마와 채용비리 사건으로 금융감독원의 권위가 추락했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고 있다. 사진은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뉴시스]
이어 그는 “은행권 채용비리 수사가 마무리 수순으로 접어드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 검찰이 현직 은행장을 상대로 영장을 청구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국면이 어떻게 바뀔지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CEO 리스크는 금융권을 대하는 국민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의 고전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금감원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최흥식 전 원장에 이어 후임으로 선발된 김기식 전 원장마저 낙마하면서 자존심을 구긴 데다, 금감원 내부에서도 채용비리 사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4월 금감원의 민원처리 전문직 채용 과정에 부당하게 관여한 혐의로 구속됐던 이병삼 전 금감원 부원장보는 1심에서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전 부원장보는 2016년 금감원의 민원처리 전문직 채용 과정에서 서류를 조작하는 등 부당하게 업무를 처리해 부적격자를 선발한 혐의를 받았다.
이런 와중에 함 행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금융당국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11월 ‘채용비리 근절 방안’을 발표하며 금융권 전반에 확산된 채용비리를 뿌리 뽑겠다고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금감원장 2명의 불명예 퇴진에 이어 자체 채용비리 사건까지 불거지자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금융사들을 향해 쏜 화살이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금감원 부원장보가 채용비리로 징역형을 받은 와중에 금융권 CEO가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면 채용비리는 금융권 감시기관인 금감원이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금감원 채용비리는 금융권 비리에 가려져 조용히 묻혀버렸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건 시중은행이나 금융당국 모두 채용비리와 관련해 추락한 이미지를 다시 개선하고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6월 4일 윤석헌 금감원장은 금융협회장들과 간담회를 가진 뒤 “과거 채용 과정에서는 고학력자와 남성을 우대하거나 임직원추천제를 운영하는 행위가 개별 회사의 재량 범위에 속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이 같은 관행을 모두 떨쳐버리고 공정하고 투명한 금융권 채용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금융권에서는 정권교체 시마다 반복되는 ‘금융 CEO 수난사’가 더는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핀테크(금융+기술), 블록체인 등 미래금융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정보기술(IT)과 금융서비스의 융합을 촉진하려면 금융당국과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채용비리 수사가 반년 넘게 지속되면서 금융그룹 계열사들이 추진하는 신사업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금융계 한 인사는 “금융당국은 주요 최고경영자들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각 금융사의 신사업과 관련된 인가 심사를 미루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나라 금융은 발전은커녕 퇴보할 게 뻔하다”고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