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펴낸 최혜영 교수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펴낸 최혜영 교수 [최혜영]
그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비극이다. 신화적 이야기에 토대를 뒀다고 하지만 친부살해(오이디푸스), 친모살해(오레스테스), 친자살해(메디아), 남편살해(클리타임네스트라), 근친상간(오이디푸스)처럼 반인륜적 내용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이에 영감을 얻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엘렉트라 콤플렉스 같은 정신분석학적 용어가 탄생했다. 또 신성한 왕 또는 아비에 대한 살해 기억이 공동체의 초석을 이룬다거나, 가부장제적 억압에 대한 원초적 폭로라는 신화적·인류학적 해석의 원천이 됐다.
5월 출간된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이런 심미적 해석에 통타를 가한다. 고대 그리스비극이 순수문학이 아니라 지독히도 현실참여적인 문학이었음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 비극들은 기원전 5세기 전후 일종의 아테네 우선주의에 기초해 당시 그리스 내 적대국 내지 경쟁국을 깎아내리는 한편, 아테네 시민의 단결을 끌어내기 위한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가까웠다. 오늘날 신문, 영화, 축구 등이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작동시키는 데 훌륭한 기제로 작용하듯이, 아테네에서는 비극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던 셈이다.
이 책을 집필한 최혜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국내에서 박사학위 수료 이후 1993~98년 그리스 본토에서 그리스사를 공부했다. 그리스 국가장학금을 받고 이와니나국립대에서 그리스 문화를 사랑한 로마황제 율리아누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에라스무스 장학금을 받고 영국 런던 킹스칼리지에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그리스·로마사에 대한 국제학계의 흐름까지 익혔다. 그는 지난해 9월부터 연구년을 맞아 해외와 지방을 다니고 있다. e메일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번 저술의 핵심과 의미를 짚어봤다.
고대 그리스의 오패(五覇)
[사진 제공 · 푸른역사]
“우리는 아테네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스파르타도 어느 정도 알지만, 테베나 아르고스의 역사는 거의 모르잖아요. 그 이유는 후대에 전하는 사료가 대부분 아테네인들 중심으로 남겨졌기 때문이에요. 트로이 전쟁을 다루는 책이자 그리스 최초의 문학인 ‘일리아스’에는 아르고스(아가멤논의 나라)가 전 그리스군을 지휘하는 나라, 즉 최강대국으로 나와요. 그다음 이른바 역사시대에는 우리가 잘 아는 스파르타가 그리스 최고 중무장 보병의 나라로 이름을 높이게 됩니다. 아르고스는 늘 스파르타를 제치고 옛날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했어요, 두 나라 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아 서로 싸우기도 많이 했고요.”
아르고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 남단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라이벌이었다면, 테베와 아테네는 그리스 중부지역에서 국경을 맞댄 라이벌이었다. 테베가 보이오티아 지역동맹의 맹주였다면, 아테네는 아티카 지역동맹의 맹주였다. 또 테베가 농업에 기반을 둔 과두정이라면, 아테네는 해군력에 기반을 둔 민주정으로 마치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과 프랑스를 능가하는 앙숙관계였다. 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에 위치한 코린토스는 시칠리아에 식민국가 시라쿠사를 세울 정도로 그리스 최초의 해양강국이었다. 그러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해양강국으로 부상하면서부터는 해상권을 두고 ‘너 죽고 나 살자’는 최악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다.
“사실 ‘일리아스’에서 아테네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은 국가에 불과했는데, 페르시아 전쟁기(기원전 492~479)를 거치면서 그야말로 급부상한 국가가 됐어요. 헤로도토스는 아테네의 급부상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하죠. 바로 민주정이 들어서면서 아테네의 국력이 아주 커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파르타가 한때는 아테네인들이 참주를 쫓아내는 것을 도와주었다가 아테네의 부상이 민주정 때문이라고 느껴 다시 아테네에 참주를 세우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그리스 최대 해양강국이 돼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테베와 코린토스는 자기들만으로는 아테네와 싸워 승산이 없다고 보고 당시 최강국인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유명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445)과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이죠. 결국 스파르타가 승리하지만 기원전 4세기에 이 스파르타를 누르고 그리스 패권을 잡은 나라가 테베였어요. 그러다 테베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파괴되면서 그리스 폴리스 시대는 막을 내리고 헬레니즘 시대가 들어서게 됩니다.”
이들 5패국을 대표하는 영웅도 따로 있다. 아르고스의 페르세우스, 스파르타의 헤라클레스, 아테네의 테세우스, 테베의 오이디푸스, 코린토스의 벨레로폰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아테네에서 발표된 그리스비극은 결국 아테네를 제외한 이들 나라의 영웅과 그 핏줄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일환으로 창작됐다.
테베가 단골무대가 된 이유
그리스비극의 경연장이던 아테네 디오니소스 극장. 아크로폴리스 남동쪽 기슭에 있다(왼쪽). 왼쪽 그림은 폴란드 화가 안토니 브로도프스키의 ‘눈 먼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1828). [최혜영, 사진 제공 · 푸른역사]
“테베는 역사적으로 아테네의 오랜 앙숙이기도 했지만 페르시아 전쟁 때 그리스 국가 가운데 페르시아 편을 들었던 매국노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뒤 아예 멸망시키려 했는데, 아테네를 견제하려는 스파르타에 의해 겨우 살아남게 됩니다. 게다가 스파르타를 부추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게 했으니 더욱 얄미울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그리스비극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또 그만큼 많이 저주를 받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르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영웅인 오이디푸스 신화를 끌고 와 근친상간의 나라, 존속살인의 나라, 신들의 저주를 받은 나라가 테베라는 흑색선전(데마고기)을 펼친 셈이다. 소포클레스의 또 다른 작품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무덤이 아테네가 지배하던 콜로누스에 있다며 테베의 영웅조차 테베를 버리고 아테네를 축복했다고 강변한 정치적 프로파간다였다.
“호메로스 작품 속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하지도 않았으며, 모든 진실이 밝혀진 다음에도 계속 테베를 통치하다 왕의 신분에 합당한 장례식을 치르고 테베에 묻힙니다. 또 오이디푸스의 쌍둥이 아들이 오이디푸스를 쫓아내지도 않았고, 또 두 아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한 때도 오이디푸스가 죽고 난 다음이었다고 전합니다. 오이디푸스의 2남 2녀도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소생이 아니라, 또 다른 아내였던 에우리가네이아의 소생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멀게 했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사이에서 네 자녀를 두었으며, 살아생전 두 아들에 의해 감금당했다 추방돼 비참하게 떠돌았고, 마지막에는 아티카 영토인 콜로누스에 묻힌 것으로 그립니다.”
오이디푸스가 테베가 아니라 아테네 땅에 묻히는 각색은 도대체 왜 필요했을까. 이것은 고대의 영웅숭배 전통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대에는 각 영웅이 자신이 묻힌 곳의 사람들을 도와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즉 테베의 대표 영웅 오이디푸스가 아티카 영토 콜로누스에 묻혀 있다면 그가 테베가 아니라 아테네를 도와준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실제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후일 테베가 아테네에 쳐들어올 텐데, 그때 자기가 아테네인을 도와 테베인을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르고스, 코린토스 그리고 스파르타
[최혜영]
“아르고스는 스파르타와 동맹국일 때도 있고, 아테네와 동맹국일 때도 있는 변덕스러운 나라였습니다. 스파르타를 물리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패권을 잡고 싶으면서도 그럴 실력은 못되는 상황에서 이리저리 눈치를 봤던 거죠. 그래서 스파르타식의 과두파와 아테네식의 민주파가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거든요. 아르고스의 과두파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원한 반면, 민주파는 아테네와 동맹을 원했습니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그런 아르고스를 한편으론 어르고, 다른 한편으론 달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테네 입장에서 최대 맞수는 스파르타였다. 특히 그리스비극이 발표되던 시기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스파르타를 겨냥한 작품으로 스파르타의 시조신인 헤라클레스를 나약한 존재로 그린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의 여인들’이나 에우리피데스의 ‘미친 헤라클레스’, 스파르타의 왕비가 트로이 전쟁의 원흉이라 비판한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 같은 작품이 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무게감에 비해 이들 작품의 호전성은 확연히 떨어진다.
“테베가 기원전 5세기 내내 아테네의 숙적이었던 데 비해,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 최고의 전우이자 그리스 전체에서 리더적인 나라였습니다. 즉 테베가 아테네와 국력도 비슷하고 국경을 맞댄 명백한 주적국이라면, 스파르타는 최고 군사강국으로 아테네도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나라였던 거죠. 아테네 내에도 친스파르타주의자가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해양국 라이벌로서 코린토스와 관련된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다. 주인공인 메데이아나 이아손은 코린토스 출신이 아니지만 구체적 비극이 벌어지는 장소가 코린토스다. 게다가 메데이아의 끔찍한 분노와 저주를 불러일으킨 원흉이 코린토스의 왕과 공주인 크레온과 글라우케이고, 그런 코린토스 왕실의 데릴사위가 되려 했던 이가 이아손이란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 전의 여러 전승에서는 메데이아가 제 손으로 자식들을 죽인 게 아니라, 아이들의 귀여운 손으로 치명적 결혼선물을 글라우케에게 전하게만 했을 뿐입니다. 아이들을 죽인 것은 코린토스 사람들이 크레온과 글라우케의 복수를 위해 저지른 일입니다. 그런데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 스스로 친자살해의 범죄를 저지르게 각색했습니다. ‘메데이아’를 페미니즘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던데, 그보다는 코린토스 왕실의 야비함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봐야 합니다. 이 작품에서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갑자기 등장해 메데이아에게 청혼하는 장면이 어색하다는 지적이 많은데 이 역시 코린토스와 아테네를 대비시려는 위한 장치로 봐야 이해가 됩니다. 코린토스 왕가의 사위가 되려는 이아손은 신의를 저버리는 파렴치한이고, 코린토스 왕은 결혼서약이라는 신성한 윤리를 짓밟는 데 비해 아테네 왕은 합리적이고 신실하며 인정 많은 존재로 각인시키려는 거죠.”
아테네 수호신 자리를 놓고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대립을 형상화한 조각품. 파르테논 신전 조각품을 복원한 것이다. [사진 제공 · 푸른역사]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안티고네다. 소포클레스 이전의 전승에서 안티고네라는 인물은 그 존재가 미미하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다 소포클레스를 만나면서 국가 논리를 강요하는 외삼촌 크레온 왕에 맞서 인륜의 논리를 펼치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캐릭터를 부여받게 된다.
“안티고네의 생생한 캐릭터는 전적으로 소포클레스의 창안에 의거합니다. 같은 그리스비극에서도 안티고네에 대한 설정이 다릅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오라비의 매장의식을 치른 뒤 죽음을 택하고, 그녀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과 그 어머니가 그 뒤를 이어 숨집니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의 극에서 안티고네는 약혼자인 하이몬의 도움으로 달아나 하이몬의 아들을 낳습니다. 이후는 전승된 사료가 조금씩 다른데 안티고네가 하이몬에 의해 살해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비극 속 여성은 능동적이고 당당하며 주체적이다. 그로 인해 고대 아테네의 여성들에겐 비록 참정권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여성 인권이 강했으며, 여성이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증거라 보는 이들도 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이는 억측에 불과하다. 비극의 배경이 되는 나라가 아테네의 대척점에 선 폴리스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여성이 남성 역할을 대신하는 나라=망조가 든 나라’임을 부각하기 위한 극작술의 일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비극에 나타나는 적극적인 여성상은 여권의 상징이라는 긍정적 측면이라기보다 오히려 상대 국가를 폄훼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테베를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 사회, 즉 안티고네 같은 여자가 남자같이 용감하고 크레온 같은 남자가 여자같이 비겁한 사회, 시체 매장이라는 신들의 불문율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 명예로운 행동이 짓밟히는 사회, 왕실의 혈통이 끊긴 사회, 폭군이 지배하는 사회로 그려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테네가 등장할 때는 어김없이 민주정의 나라, 신들을 경외하는 나라, 남성이 남성다운 사회, 자손이 번성하는 사회로 그려집니다.”
그리스비극은 본디 비극이 아니었다
디오니소스 목조상을 둘러싼 채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는 여인들. 고대 그리스 도기에 그려진 그림을 복원한 것이다. [사진 제공 · 푸른역사]
“트라고디아는 ‘염소(tragos)’와 ‘노래(ode 혹은 oide)’의 합성어로, 말 그대로 ‘염소의 노래’란 뜻입니다. 그 원뜻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디오니소스 신과 염소가 결합됐다는 것과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쳐진 제의적 노래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슬픈 이야기’라는 뜻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전신을 엔코미아(enkomia)라고 봤는데, 이는 찬양하고 높이는 노래를 뜻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원래 비극은 디오니소스 신을 ‘환대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 바쳐진 여러 제의 가운데 하나인 무대극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이는 극장(theatre)의 어원이 된 테아트론(theatron)이란 고대 그리스어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테아트론은 ‘보는 도구’라는 뜻인데, 여기서 보고 즐기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비극의 소재로 당시 정세와 연관된 아테네 적국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다 보니, 그 어두운 면이 강조돼 슬픈 이야기가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헬레네’나 ‘이온’ 같은 작품은 비극이라고 보기 힘들어 일부 학자는 이 작품들을 ‘희극(코미디)’으로 분류한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본디 디오니소스는 아테네의 앙숙인 테베의 주신이다.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 신앙이 처음 상륙한 곳이 테베였고 그 신전이 처음 생긴 곳도 테베였다. 그런데 어떻게 테베의 앙숙인 아테네에서 비극을 잉태하게 됐을까.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라는 기본적인 특징 외에 출신지나 활동 지역, 시기, 기능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별명,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생명의 신이기도 하고, 죽음의 신이기도 하며, 동물의 모습으로도 인간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인간의 모습일 때도 젊은 청년, 수염이 난 성인, 아기 등으로 다종다양합니다. 이런 여러 종류의 디오니소스 신은 서로 비슷하게 취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다른 신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이는 다른 신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아테나 여신 역시 트로이의 ‘아테나 팔라스’ 여신과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는 별개의 존재에 가까웠습니다. 대디오니시아 제전의 주인공은 디오니소스 엘레우테리오스, 즉 ‘엘레우테라이에서 온 디오니소스’였습니다. 아크로폴리스 남동쪽 기슭에 자리한 디오니소스 극장엔 디오니소스 엘레우테리오스에게 바쳐진 좌석과 디오니소스 멜포메네에게 바쳐진 좌석이 따로 있었습니다. 디오니소스 멜포메네를 위한 의자는 평범한 일반석인 반면, 디오니소스 엘레우테리오스를 위한 좌석은 가장 화려한 특별석으로, 관람하기 가장 좋은 맨 중앙에 놓여 있습니다.”
엘레우테라이는 원래 테베의 지배권에 있다 기원전 6세기 아테네로 편입됐고, 훗날 다시 테베로 복속된 국경분쟁지역이었다. 고대의 관행상, 새롭게 편입된 지역을 다독이면서 아테네 공동체에 머물러 있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기제는 공동의 신을 함께 섬기는 축제의 거행이었다. 그래서 엘레우테라이 출신 디오니소스 신의 아테네 도래를 영접하고 그 영예를 기리는 축제로 발전한 것이다.
이 축제는 당시 아테네의 3대 축제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다른 두 축제는 아테네 여신을 섬기는 ‘판아테나이아’와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를 섬기는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였다. 엘레우시스 역시 기원전 6세기 전후 아테네 영토로 병합된 지역이라는 점에서 엘레우테라이의 경우와 닮은꼴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쟁 시 군사력이나 정치적 협상력 같은 실제적 수단 못지않게, 종교적 요소나 관행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했던 것이 ‘신 모셔내기’ 혹은 ‘신 불러내기’로 번역될 에보카티오(evocatio) 의식이었습니다. 전염병, 흉년, 특히 전쟁 같은 국가적 위기를 맞았을 때 이를 타개하고자 도움을 줄 신이나 영웅을 영접하는 의식입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은 도시마다 수호신이나 수호영웅이 있어 전쟁 때는 각자 자기가 속한 나라를 돕는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적국을 점령할 때도 그 나라의 수호신이나 영웅들을 회유하는 것이 중요한 선행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테네가 대디오니시아 제전을 중시한 것은 국경을 맞댄 최대의 숙적이던 테베의 주신인 디오니소스 신을 달래 아테네 편으로 돌아서게 할 필요가 있어서였던 겁니다. 그 산물로 탄생한 그리스비극 속 주요 무대가 테베가 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