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5

2004.12.23

남대문서 떠나 한강나루 지나고

정사 조엄 일정에 맞춰 똑같이 순례 … 후암동·싸리고개·말죽거리 거쳐 양재역서 첫날 밤

  • 도도로키 히로시/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hstod@hanmail.net

    입력2004-12-16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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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서 떠나 한강나루 지나고

    나룻배가 오가던 한강 나루터 풍경. 이 나룻배들은 한남대교가 건설되면서 사라졌다.

    팔월 초삼일 정해(丁亥). 아침에 흐리고 늦게 갰다. 평명(새벽)에 조정을 하직하고, 오늘은 양재역까지 갔다.

    나는 길을 떠나며 영조 39년(1763) 일본으로 향한 정사 조엄의 일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가 남긴 ‘해사일기’라는 일기에 충실하기 위해, 그가 점심식사를 한 곳에서 점심을 먹고 그가 잔 곳에서 잠을 잘 것이다.

    조엄이 길을 시작한 때는 팔월 초삼일, 출발지는 서울 남대문이다.

    남대문을 나오면 옛길은 지금의 후암동으로 이어진다. 일제시대 삼판통(三坂通)이라고 불리는 일본인 마을이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재개발이 한창이지만, 여전히 곳곳에 일본식 건물이 남아 있다.

    후암동을 지나면 잠시 조엄이 걸었던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 옛길이 미군기지로 막혔기 때문이다. 돌아서 해방촌을 지나 지금의 이태원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이태원은 조선시대 이태원과 전혀 다른 곳인데, 원래 이태원은 지금의 후암동 쪽 용산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쯤이었다. 우리가 요즘 말하는 이태원 거리는 그곳과 전혀 다른 장소에, 해방 뒤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새로 생겼다.



    남대문서 떠나 한강나루 지나고

    외국인들로 붐비는 이태원 거리.

    이태원의 유래 梨泰院인가 異胎院인가

    현재 이태원의 한자는 ‘梨泰院’으로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이름이 실은 ‘異胎院’, 즉 외국인의 거리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이곳에 진을 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또다시 일본인이 이곳을 군사 거점으로 삼았고, 해방 뒤에는 미군 등 서양인들의 위락장소가 되었으니, 어쩌면 이태원은 지명의 내력 때문에 외국인의 활동 거점이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덕(?)에 지금 이태원에는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힘든 여러 나라의 음식점과 음식 재료 가게가 즐비하다. 필자가 먹어본 요리만 해도 인도, 파키스탄, 터키, 멕시코, 스페인, 태국 요리 등 다양하다. 지나가는 외국인 가운데 미국인이 압도적인 만큼 미국 음식점이 가장 많다.

    이색적인 것은 일본 식당이 드물다는 것. 이 지역에 최초로 들어왔던 외국인은 분명 일본인이었지만, 현재는 이 지역에 별로 살지 않고 동부이촌동에 집중해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일본 음식을 맛보고 싶으면 이제 그쪽으로 가야 한다.

    남대문서 떠나 한강나루 지나고

    조엄이 걸은 통신사 길이었던 강남대로.

    이태원의 중심가를 뒤로하고 크라운호텔을 지나면, 통신사 길은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이 길 양쪽에는 각국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데, ‘대사관 거리’를 빠져나가면 눈앞에 갑자기 한강의 경치가 펼쳐진다. 통신사들이 한강을 건넜던 한강나루다.

    한강에 당도하니, 큰형님이 이미 나루 머리에 나와 있기에 조금 쉬어 작별하였다. 홍익빈 등 일곱 명의 인사가 여기에까지 와서 작별하였고, 친척들은 강 머리에서 작별하였다.

    조선시대 서울의 경계는 사대문이었다. 그러나 넓게는 주변의 약 10리까지를 한성부의 ‘교외 지역’, 즉 서울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그 남쪽 끝이 바로 한강이었다. 그래서 서울이나 근교에 사는 통신사의 친지들은 한강에까지 그들을 따라오다가 나룻배를 타는 것을 마지막으로 배웅한 뒤 돌아갔던 것이다. 한강부터 남쪽은 이제 ‘외지’로 여겨졌기 때문에, 작별은 이곳에서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조엄은 작별 인사하러 이곳까지 와준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데에 섭섭했던 모양이다.

    옛날에는 온 조정이 남교(남대문 바깥의 교외 지역)에까지 배웅 나와주었다고 하는데, 금번에는 수십명에 지나지 않아서 (좋은) 풍속의 쇠퇴와 조정의 푸대접이 한탄스럽다.

    이처럼 조정을 지목하면서까지 세태를 개탄하고 있다. 사실 이런 상황 변화는 통신사행이 일상화되고 한일관계가 안착된 증거로 볼 수도 있을 텐데, 난생 처음 바다 건너 오랑캐 땅으로 가는 조엄으로서는 크게 서운했던 모양이다.

    조엄의 일기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당시 한강나루 언덕 위에는 ‘제천정(濟川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왕실 소유로 정자라기보다 별장에 가까운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역대 통신사들은 한강을 건너기 전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배웅 나온 사람들과의 마지막 작별을 위해서였다. 작별 인사를 마친 뒤 3명의 사신과 수행원은 각각 나뉘어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왕의 명을 들고 가는 통신사 행렬이기는 했지만, 왕의 행차 때와 달리 배다리가 편성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남대문서 떠나 한강나루 지나고


    남대문서 떠나 한강나루 지나고

    말 모양의 표지석이 서 있는 오늘날의 말죽거리

    한강나루 정자에서 배웅객과 작별 인사

    이 한강나루에서는 1969년 다리가 준공되기 전까지 배가 오갔다고 한다. 한강나루를 바라보며 지어진 신축 고급아파트의 경비원 아저씨는 당시 뱃사공 동네였던 한남동 토박이인데 “제3 한강다리(한남대교)가 생기니 없어졌지. 그 전까지는 말죽거리 갈 때 늘 그거(배) 타고 다녔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지금은 배나선착장의 흔적조차 없으니, 나는 그냥 한남대교를 걸어서 건너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건너도 강남 신도시나 8학군이 있었을 리 없다. 조엄에 따르면, 나지막한 언덕 지대에 논과 채소밭, 한적한 마을만 있었다. 대신 그가 걸은 통신사 길은 지금의 강남대로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일직선의 대로가 아니라 지형에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을 텐데, 지금은 도시개발로 모든 길이 거의 직선화됐기 때문에 옛길의 모습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유일하게 옛길을 찾을 수 있는 구간이 ‘뱅뱅사거리’ 쪽이다. 강남대로와 동쪽에 나란히 있는 길인데, 이 길에 들어서면 완만한 오르막 끝에 고개가 보인다. 최근 새로 건립된 비석에는 ‘싸리고개’라고 쓰여 있다.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서울로 쌀을 실어가는 고개였기 때문이라는 의견, 고갯마루에 싸리가 많이 있어서 그렇게 됐다는 의견, 고갯마루에서 서울 남산을 볼 수 있어서 붙었던 ‘서울고개’라는 이름이 와전된 것이라는 의견 등이 전해진다. 이 고개 주변에는 강남답지 않게 옛집들도 조금 남아 있어서 한적한 시골마을이던 옛 강남의 모습을 상상할 만하다.

    싸리고개를 넘으면 바로 영화로 유명해진 말죽거리가 나온다. 조선시대에 양재역이 있던 자리다. 이때의 양재역이란 지금의 지하철 3호선 양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말을 갈아타던 장소를 말한다. 그래서 ‘말에 죽을 먹이는 거리’라는 지명도 생겼을 것이다.

    양재역은 조엄이 이 길을 지났던 당시 ‘찰방역’이라고 하여 주변 여러 개의 역을 총괄하는 역이었다. 이 때문에 특히 규모가 컸고, 공무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시설도 잘 정비돼 있었다. 조엄은 이곳에서 첫날 잠을 잔다.

    저녁에 역촌에서 잤다. 길에서 칠언절구(七言絶句) 두 수를 지었다. 이날은 20리를 갔다.



    ● 가볼 만한 곳 ●

    미국식 햄버거 전문점 내슈빌

    한국에서 햄버거는 건강을 해치는 패스트푸드의 대표로 인식되고 있지만, 정작 미국에서는 가정요리로도 사랑받고 있다고 한다.

    이태원에는 ‘내슈빌’ 말고도 본고장의 햄버거를 내주는 미국식 레스토랑이 많다. 야채도 듬뿍, 고기도 두툼한 ‘웰빙 햄버거’다.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에서 노사평역 방향으로 걸어서 2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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