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8

2011.05.23

디지털 음질에 아날로그적 울림

플리트 폭시스 ‘Helplessness Blues’

  • 정바비 julialart@hanmail.net

    입력2011-05-23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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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음질에 아날로그적 울림
    나는 등산을 싫어한다. 심지어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인터넷에 ‘등산증오클럽’을 만든 적이 있을 정도다. ‘정상에 오르는 순간 짜증은 극에 달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달았던 그 클럽은 이렇다 할 활동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등산에 대한 나의 혐오감은 여전하다. 깨끗한 공기를 벗 삼아 일상의 무기력함에서 벗어나는 게 문제라 생각지 않는다. 나는 그저 등산이 싫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건 산이 아니라 인간일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주말 아침, 누군가에게 등산을 강요하지 않고선 못 견디는 권위적인 아버지, 교수님, 사장님 말이다.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매체를 통해 감동과 영감의 콘텐츠를 전달하고자 하는 건 실로 인간미 있는 행동이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류의 감성시를 헬로 키티 편지지에 손글씨로 적어 주는 여자친구만큼 그 매체에선 등산 마니아 사장님도 사랑스러운 존재다.

    콘텐츠와 매체. 음악에 있어 이 주제로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지점은 MP3가 아닐까 싶다. 많은 올드 팬은 “엘피(LP) 시절이 좋았다”고 말한다. 신생아를 들듯이 조심조심 비닐판을 꺼내 전용 천으로 먼지를 닦아낸 후 전축 바늘을 서서히 위치시키는 장엄한 광경은 마우스 ‘클릭질’에 비길 바가 못 된다. 또 스튜디오에서 장인이 한 땀 한 땀 빚어낸 무손실 마스터 음원을 기계적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음장을 풍부하게 해주는 가청역대 바깥 주파수와 배음이 사라진다는 분석도 있다. “MP3로 음악을 들은 세대는 영혼을 울리는 음악에 반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단언엔 등골이 오싹해진다.

    하지만 최근 새 앨범 ‘헬프리스니스 블루스(Helplessness Blues)’를 발표한 플리트 폭시스(Fleet Foxes) 앞에서 그런 섣부른 예상은 완벽히 빗나간다. ‘바로크 팝의 21세기 재림’이라는 극찬을 받는 플리트 폭시스의 리더 로빈 펙놀드는 “‘냅스터(napster)’를 통해 접한 MP3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냅스터는 알다시피 소리바다 같은 파일 셰어링 프로그램의 원조. 한발 더 나아가 그는 “냅스터가 등장한 후 음악이 질적으로 나아졌다”고 말한다.

    이 발언을 접하고 그들의 음악적 뿌리 중 하나인 ‘닐 영(Neil Young)’의 고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캐나다 시골 소년이던 닐 영은 시내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느라 주크박스 바에서 가진 동전을 다 쓰고나서야 돌아오곤 했다. 소란스러운 술집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시원찮은 음질의 노래를 음악적 자양분으로 삼은 닐 영, 그리고 MP3 세대임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 로빈 펙놀드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닐 영과 플리트 폭시스의 음악에서는 공통적으로 인간 존재 및 자연에 대한 진중한 성찰과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그 울림이 LP와 MP3를 가려서 퍼질 것 같지는 않다. 잊고 지냈던 작은 소리들, 숨 쉴 수 있는 공기에 대한 소중함…. 주변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콘텐츠가 이런 것이라면 주말 등산 대신 폴리트 폭시스의 앨범을 매체로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디지털 음질에 아날로그적 울림
    정바비는 1995년 인디밴드 ‘언니네이발관’ 원년 멤버로 데뷔한 인디 뮤지션. ‘줄리아 하트’, ‘바비빌’ 등 밴드를 거쳐 2009년 ‘블로컬리 너마저’ 출신 계피와 함께 ‘가을방학’을 결성, 2010년 1집 ‘가을방학’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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