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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고난과 갈등의 땅, 크림 반도

러시아 지중해 진출 위한 전략 요충지…우크라이나와 분단 수순 밟나

  • 김기용 동아일보 기자 kky@donga.com

고난과 갈등의 땅, 크림 반도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지중해를 자세히 살펴보면 가장 중요해 보이는 지역 3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지브롤터 해협, 태평양-홍해를 지중해와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 그리고 흑해에서 지중해로 들어가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모두 ‘지중해 입구’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가운데 보스포루스 해협은 최근 러시아의 크림 반도에 대한 ‘집착’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부터 러시아는 늘 지중해로 나가고 싶어 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동토(凍土)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풍요로운 지역으로 향하고 싶은 인간 본능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중해로 나가려는 욕구는 얼지 않는 항(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려는 욕구와 정확히 일치했다.

러시아가 지중해로 나가려면 보스포루스 해협이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을 자유롭게 이용하려면 흑해를 영향권 내에 둬야 한다. 러시아로선 흑해 한가운데를 향해 튀어나온 크림 반도를 접수하는 것이 곧 흑해를 접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결국 ‘크림 반도→흑해→보스포루스 해협→지중해’ 루트의 시발점이 크림 반도인 셈이다.

크림 반도는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몽골 제국(킵차크한국)이 지배하다 1400년대 중반 오스만튀르크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오스만튀르크는 이곳에 ‘크림한국’을 두고 속국으로 삼아 약 300년을 지배했다. 지역 토착민인 ‘크림 타타르 족’이 ‘크름(언덕)’이라 불렀던 것에서 ‘크림’이라는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카테리나 2세 크림 반도 확보



1700년대 중반 전성기를 지난 오스만튀르크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 무렵 러시아는 급성장했다. 제정 러시아의 여제(女帝) 예카테리나 2세는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남하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에 국경을 맞대고 있던 오스만튀르크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오스만튀르크 전쟁(1768~1774)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1774년 ‘퀴카이나르자’ 조약을 맺고 크림한국을 오스만튀르크에서 독립하게 한 뒤 러시아 관리 아래 뒀다. 사실상 크림 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는 9년 뒤인 1783년 크림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크림 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예카테리나 2세는 눈여겨보던 크림 반도 남부에 세바스토폴 항을 건설하고 이곳에 함대를 주둔하게 했다. 이것이 흑해함대 시초다. 크림 반도를 확보하고 부동항을 얻은 러시아는 흑해함대를 앞세워 70여 년간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러시아의 남하(남서진)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영국, 프랑스는 오스만튀르크와 손잡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른바 크림 전쟁(1853~1856)이다. 약 3년간 최소 50만 명 이상 사망했다. 영국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이 전쟁에 간호병으로 참전해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영국, 프랑스, 오스만튀르크는 약 6만 명의 대군을 크림 반도에 상륙시켜 세바스토폴 항을 포위,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러시아는 그토록 애타게 원했던 부동항 세바스토폴을 스스로 파괴하고 퇴각하는 수모를 겪었다.

전쟁 후 1856년 체결한 ‘파리조약’을 통해 흑해는 중립지대가 됐고, 러시아는 함대를 배치할 수 없게 됐다. 흑해함대의 ‘흑역사’ 시기다. 이후 크림 반도는 주인 없는 땅이 돼 열강의 각축장이 됐다.

하지만 15년쯤 지난 뒤 기회가 찾아왔다. 마침 독일을 통일하려던 프로이센과 이를 막으려던 프랑스 간 전쟁(1870~1871)이 일어났고, 러시아가 지지한 프로이센이 승리하자 프로이센의 비호를 받은 러시아는 곧바로 ‘파리 조약’ 파기부터 선언했다. 흑해함대를 재건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1914~18) 전 유럽 혼란기를 틈타 크림 반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38선 그은 얄타회담이 열린 곳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1917)이 일어나고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건설되면서 흑해함대는 더 강화됐다. 사회주의를 확산하고 자본주의를 저지하려면 지중해에 대한 영향력 강화가 더욱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이때는 우크라이나도 소련의 일부였다. 크림 반도는 명백한 소련 땅이었다.

그런데 1954년 소련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갑자기 넘겼다.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결정이었다. 흐루쇼프를 키워준 건 8할이 우크라이나다. 흐루쇼프는 1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에 가입한 후 라자르 카가노비치 서기장의 눈에 들어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치기도 했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긴 것이다. 당시에는 어차피 소련 내에서의 변동이었기 때문에 ‘행정구역 변경’ 정도 의미였다. 문제는 소련 붕괴와 함께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서 불거졌다.

1992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분리독립하면서 크림 반도는 크림자치공화국이 됐다. 우크라이나에 속하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확보한 것. 하지만 이때부터 불씨가 상존해왔다. 크림자치공화국은 러시아어가 공용어고, 주민 대다수(약 60%)가 러시아계다. 우크라이나계는 20% 정도에 불과하다. 또 세바스토폴 항에는 최강인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해 있다. 당초 2017년까지 사용할 수 있었지만, 2010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협상을 통해 2042년까지 흑해함대를 유지할 수 있게 조차 기간을 연장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반정부 시위대에 의해 쫓겨난 이후 세계 이목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가 아닌 크림 반도에 집중됐다. 반(反)러시아 성향의 우크라이나 정부가 들어설 경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크림 반도에서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월 4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로 군대를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크림 반도에 주둔 중인 흑해함대 병력 외에 추가로 우크라이나에 파견한 러시아군은 없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의 기자회견 후 크림 반도 위기는 한 고비를 넘긴 모양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랬듯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포기할 수 없다.

한국의 전라도와 제주도를 합한 정도의 크림 반도(2만5600km2)는 우리에게 ‘얄타’가 있는 곳으로 더 잘 알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국, 소련 수장들은 크림 반도에 있는 휴양도시 얄타에서 회담을 열고 한반도를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둘로 나누는 것을 논의했다. 우리에게 분단의 아픔을 안겼던 그곳이 이제 분단의 길로 접어들지 지켜볼 일이다.



주간동아 928호 (p54~55)

김기용 동아일보 기자 k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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