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0

2011.08.16

충무공 이순신은 인생 편집력의 화신

  • 김용길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harrison@donga.com

    입력2011-08-16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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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 이순신은 인생 편집력의 화신
    이순신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서서 세종로 사거리를 건너는 시민들을 내려다본다. 고민 많은 중년남자는 출근길 광화문광장에 서 있는 이순신 동상을 올려다본다. 오늘 따라 굳은 표정의 화석화한 충무공이 아니라 한 남자로 다가온다. 그는 버겁고 힘들어하며 때론 굵은 눈물을 뿌리는 조선 남자였다. 선병질에 걸린 듯한 선조의 끝없는 의심에 힘겨워했다. 당쟁과 문약에 빠진 조정이 남쪽 바다로 보내는 얄팍한 술수를 써도 그는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가슴속 칼날이 쉴 새 없이 징징 울어댔다. 몸에 와 닿는 시대의 채찍질에 온몸 상처가 벌겋게 달아오른 초로의 남자. 푸르스름한 그의 눈빛이 허무하게 서늘했다. 그의 조국은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이순신(1545~1598)은 위대한 편집자다. 선택은 가장 뜨거운 삶의 편집 행위다. 그는 무(武)의 세계를 택했다. 조선은 문(文)의 제국이었다. 사대부만이 사람 대접을 받았던 유교의 나라 조선. 건국 200년이 지나자 조선의 각 당파는 제 가문의 생존을 위한 이전투구로 일관했다. 백성의 암울한 생계는 치지도외였다. 이때 이순신은 문이 아니라 무를 향했다.

    그의 첫째 편집정신, 이순신은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외부를 원망하지 않고 내부 원칙만 지켜나갔다. 그는 몰락한 역적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랐다. 문신의 붓을 접고 그 대신 검(劍)을 잡았다. 활을 쏘고 말을 달렸다. 무과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 늦은 나이에 겨우 급제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조국의 먼 변방을 훑었다. 14년 동안 국경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불의한 직속상관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평생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인생의 기회는 쉬이 오지 않았다. 강등과 복직의 나날을 보냈다.

    1591년 남해가 심상치 않았다. 임진왜란(1592~1598)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마흔일곱 이순신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돼 여수 수군 사령관이 됐다.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 7년 동안 국토와 백성은 철저히 유린당했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보름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선조는 의주로 줄행랑쳤고 개전 두 달 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조선의 유일한 희망은 이순신의 남녘 수군뿐이었다.

    그의 둘째 편집정신, 이순신은 오직 승리로써 전투를 표현했다. 군인은 이겨야 존재한다. 그는 실전 상황을 장악하는 전술과 전략으로 싸움을 주도했다. 장졸은 그를 따랐다. 밖으로 국격의 기세를 떨치지 못하고 안으로 곪아만 가는 나라의 지병을 안타까워한 조선 왕조의 진정한 신민(臣民)은 자주 모함을 받았다. 시련은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패배를 허용치 않았던 주도면밀한 군인정신의 밑거름이 됐다.



    그의 셋째 편집정신, 이순신은 자신의 소멸로써 시대의 종결자가 됐다. 적은 사각사각 엄습하고 주군은 보채고 조정은 의심하고 세월은 차갑고 무력은 빈한하고 백성은 울며 자맥질할 때 그는 밤새워 뒤치며 전전반측했다. 결국 이순신은 조선 중기 나라와 왕조가 침몰할 위기를 수습해놓고 자신의 소멸로써 ‘정치적 완결행위’를 마무리했다. 살아남은 자신이 남해에서의 대승리로 말미암아 (미구에 닥칠)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을 예견한 듯하다. 이순신은 애당초 그 싹을 잘라버리는 대결단을 죽음으로써 결행한 것이다. 기나긴 최후의 전투 노량대첩. 사신(死神)이 오가는 거친 길목에서 일부러 자신을 노출시켰다. 적선 200여 척이 격침당하고 50여 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 성웅은 대업을 이렇게 완결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김훈, ‘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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