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4

2011.07.04

커져라, 세져라! 여자축구

여자 월드컵 우승 노릴 만큼 실력 갖춰…대학과 실업팀 태부족 저변 확대 어려워

  • 유재영 채널A 스포츠부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11-07-04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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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져라, 세져라! 여자축구

    6월 23일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숙대와 이대 축구 동아리 선수들이 친선 축구 시합을 가졌다.

    “패스해. 주고 나가.”

    “같이 헤딩 경합해줘. 빨리빨리.”

    서울 전역에 거센 비가 몰아치던 6월 23일 오후. 텅 빈 관중석에 빗소리만 요란하던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이색적인 라이벌 축구 대결이 펼쳐졌다. 여자대학의 맞수 숙명여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이 그 주인공. 앳된 외모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거친 고함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이날 경기는 정식 등록 축구팀이 아닌 두 학교 축구 동아리 간 대결이었다. 비록 전문 축구선수는 아니지만 분위기만큼은 뜨거웠다. 공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치열하게 뒤엉켰다. 대학에 와서 축구를 처음 접한 학생이 대부분이지만,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그저 공이 발에 와 맞을 것이라는 예상은 ‘오산’이었다. 대부분 ‘헤드업’ 된 상태에서 패스 길을 제대로 읽고 동료에게 공을 건넸다.

    수비도 완전하진 않지만 축구 이론을 제법 익힌 듯했다. 때로는 맨투맨 수비를 강하게 펼치다, 체력적으로 지친다 싶을 땐 공격수가 수시로 내려와 수비를 도왔다. 두 학교 선수가 포메이션을 갖추고 공격과 수비를 펼친 덕에 아기자기한 경기가 펼쳐졌다.



    그라운드 여대생들 오로지 축구 생각

    이들은 그저 축구가 좋아서 대학 축구 동아리에 참여한 경우다. 숙대 ‘FC SM’은 2009년 06학번 학생 주도로 창단했다. 선수는 70% 정도가 체육교육학과 소속이지만, 관현악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이 포함돼 있다. 청소년대표를 거쳐 실업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은퇴한 유동기 씨(40·기업은행 차장)가 감독이다. FC SM은 창단 후 자체적으로 훈련을 하다 지난해부터 유 감독에게 본격적으로 축구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다.

    어떤 상황이든 축구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유 감독의 지론이다. 지고 있을 때도 벤치 선수들이 인기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쏘리쏘리’ 춤을 추고 “FC 숙명! Let’s go!”라고 외치면서 흥을 돋우는 응원을 생각해낸 것도 유 감독이다.

    주말 데이트 약속이 많아야 할 20대 초반 여대생들이지만 머릿속엔 오로지 축구 생각뿐이다. 주말마다 경기 남양주까지 유 감독을 찾아가 훈련을 받는다. 유 감독은 “선수들의 열정은 국가대표급이다. 실력이 나날이 발전해 구력이 좀 있는 조기축구회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2006년 창단한 이화여대 축구 동아리 E.S.S.A는 멤버 전원이 체육과학과 학생이다. 학교 선배인 국제심판 임은주 씨와 차성미 씨의 도움을 받다가, 2009년부터 유소년 풋살지도자인 안상진(39) 감독에게 전문적으로 지도받고 있다.

    매주 2회 공을 차는데, 올해는 수준급 실력의 1학년들이 들어와 전력이 급상승했다. 안 감독은 “신입생 중엔 입학 전 축구 동아리가 있는지 학교에 물어보고 입학을 결정한 친구도 있다”며 “축구 유니폼을 입고 한 번만이라도 운동장에서 뛰어보는 게 소원이던 학생들이라 축구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하다”고 전했다.

    사실 여자가 축구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여자축구는 지난해 U-20월드컵 3위, U-17 월드컵 우승으로 세계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성인대표팀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홈팀 중국을 두 차례나 연파하고 아시안게임 첫 메달을 따냈다. 그동안 절대 열세였던 북한, 일본에도 밀리지 않을 만큼 경기력이 높아졌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 육상 등 다른 종목 선수로 급조해 출전했다가 참패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이제는 남자축구보다 성인 월드컵 우승을 노려볼 만한 단계까지 올라섰다.

    하지만 여자축구의 저변은 여전히 미약하다. 특히 고등학교팀과 실업팀을 연결하는 대학팀의 부재는 안타깝기만 하다. 현재 여자 대학팀은 울산과학대, 한양여대, 영진전문대, 위덕대, 여주대, 강원도립대 등 6개 팀에 불과하다. 서울 팀은 한양여대 1팀뿐이고, 소위 말하는 명문여대에는 축구팀이 아예 없다. 16개 고교에서 배출하는 청소년 선수가 대학과 실업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기르면서 성인대표팀에 기여할 수 있는 구조가 절실한데, 그 중간이 크게 구멍 나 있는 셈이다.

    이날 맞붙은 숙대와 이대 경기가 큰 의미를 지닌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두 학교는 한국 여자대학 축구팀의 시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정부 지원으로 축구팀을 창단해 우승을 번갈아 했으나 숙대는 1992년, 이대는 1993년 팀을 해체했다. 그래서일까. 이날 선수로 뛴 두 학교 학생은 여자축구팀의 재탄생을 누구보다 바랐다. 라이벌 대결을 정례화해 관심을 끌겠다는 각오도 엿보였다.

    FC SM 조수민 회장(체육교육학 3)은 “이대를 만나니 페어플레이가 잘 안 된다”고 웃으면서 “만약 축구팀이 두 학교에서 창단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여자축구계에 엄청난 힘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까지 선수로 뛴 FC SM 이정은(관현악 2) 양은 “정식으로 팀이 생긴다면 선수로 뛰고 싶다”고 말했다.

    연맹, 축구팀 창단 적극 지원

    이들의 소망이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여자축구연맹이 대학팀 창단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여자축구연맹은 4월 여자축구 창단 지원 사업 계획을 공고하고 일선 대학에 창단을 유도하고 있다. 사업 계획에 따르면, 대학이 축구팀을 창단할 경우 3년간 지원금과 대회 참가 보조금을 준다.

    여자축구연맹 김민열 사무총장은 “대학팀을 창단하면 해당 대학에 창단 첫해 1억 원, 2~3년 차에 5000만 원씩을 지원한다”면서 “다른 종목보다 좋은 조건이기 때문에 조만간 대학팀이 창단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축구에 대한 여대생들의 관심이 폭발적라는 점도 희망적이다. 지난해 11월 처음 공식 대회로 이틀간 열린 ‘쏘나타컵 여자대학축구클럽 리그’는 12개 동아리가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치열했던 두 학교 간 맞대결이 끝나자 선수가 하나 둘 벤치로 모여들었다. 몸은 비록 힘들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만은 그대로였다. E.S.S.A 김민정 주장(체육과학과 3)은 “축구의 재미는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만약 아기를 낳는다면 그 재미를 느끼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김효진(체육과학과 4) 양의 말은 더 의미심장했다.

    “E.S.S.A 선수들은 앞으로 ‘축구계’를 하기로 했어요. 모두가 축구하는 ‘베이비’를 키우는 축구 맘이 되기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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