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9

2011.03.21

이현승의 ‘경험주의자와 함께’

  • 입력2011-03-21 12: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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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승의 ‘경험주의자와 함께’
    그래요 전 경험주의자예요/ 경험이 나쁜 것이 아니라 경험을 맹신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당신은 내게 말했죠/ 그리고 당신은 가령 찰스 부코스키, 김수영 혹은 하나무라 만게츠 같은 경우, 삶이 곧 작품이라고 했죠/ 시인 황지우는 자신의 시낭송회에서 “시이넌 직업이 아니라 상태잉 거 가태요… 시를 쓰고 있는 순가니… 시이닝 거시죠” 했다/ 자신의 삶이 실패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름답다 그것이 한낱 자만심의 발로였을지라도 실패의 연속이 아닌 삶이 어디 있을까/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시를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불안정하고 난만한 사춘기에 시가 내게 다가왔고, 이 짓을 그만두는 방법을 몰라 계속해서 잘못 든 길을 파고 있을 뿐/ 그래요 전 경험주의자가 좋아요/ 무슨무슨 연극공연장에서 적극적인 참여 어쩌구저쩌구 하며 관객을 귀찮게 하는 시시껄렁한 굿판이 난 싫어요. 다른 세계를 조심스럽게 바라볼 수 있도록 가만히 좀 내버려두면 안 되나?/ 미용실 같은 곳 말예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달라진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보는…/ 자기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자기 같은 거 말예요 ―‘아이스크림과 늑대’(랜덤하우스, 2007)에서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보통 “어떻게 하다 시를 쓰게 됐어요?” “글재주는 타고난 건가요?” 같은 질문이 주종을 이룬다. 받을 때마다 당황스럽고 답할 때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려서부터 책을 끼고 살았다고, 백일장에 나가기만 하면 큰 상을 받았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유년 시절의 나는 글을 쓰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고, 책을 읽는 것보다 오락기 만지작거리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좋아하는 책을 종이에 적어 내던 날, 나는 정말이지 순수한 마음으로 흰 종이에 ‘국어사전’이라 적었고, 선생님에 의해 즉시 괴짜로 임명됐다.

    그러나 빛나는 한순간이 있었다. 우연히 서점에서 어떤 시집을 발견하고 37쪽의 바로 그 시를 마주하던 순간이.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에만 익숙했던 나에게 그때의 충격은 내가 당시에 알고 있는 단어들로는 표현하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충격을 글로 전달하기 위해, 그때의 충격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안겨다주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이런 하나하나의 체험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쉽게 말해, 하다 보니까.

    요컨대 ‘태어나면서부터 시를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니 시인이 됐고 ‘이 짓을 그만두는 방법을 몰라’ 오늘도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가 취미 삼아 소일거리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것 하나만큼은 똑똑히 말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경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적엔 아리따운 여선생님들은 화장실도 안 갈 것 같다고 생각했던 내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란 것이다. ‘미용실’에 가서 달라진 내 ‘헤어스타일’을 보고 흐뭇하게 웃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깨알 같은 경험들, 그리고 그 경험에서 오는 어마어마한 깨달음 덕분에 나는 내 세계를 점차 넓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괴짜’가 드디어 ‘시인’이 된 것이다.

    지금 내 앞에는 발간된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시집들이 놓여 있다. 이 책들은 ‘적극적인 참여 어쩌고저쩌고하며 관객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책을 들고 책장을 넘기며 내 눈과 귀와 마음을 시집에 자발적으로 내주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경험. 우리가 책을 읽는 것도, 시 한 줄 한 줄을 마음속에 정성껏 새겨넣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정신없이 빠르고 시끄러운 이 세상에서 하루에 몇 분이라도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나만, 나 자신만 바라보기 위해. 그 과정에서 ‘자기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자기’를 찾기 위해. 마침내 어떤 온전한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내가 아는 가장 근사한 ‘순간’에 가닿기 위해.



    이현승의 ‘경험주의자와 함께’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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