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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386세대의 진화, 新중년이 사는 법 05

‘취집’간 그녀들 ‘프로주부’로 살다

고학력 ‘NEO 50’여성 미시족 원조…지금은 끊임없이 배우고 외모 가꾸고

  •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취집’간 그녀들 ‘프로주부’로 살다

‘취집’간 그녀들 ‘프로주부’로 살다

한 전문기업의 플라워 강좌에 참가한 주부들.

“상사 중에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중년 여성은 몇 명이나 돼?”

직장인 친구 몇 명에게 물었다. 예상대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숫자가 나왔다. 이들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 시기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여학생 수가 급증한 때이기도 하다. 교육통계연구센터의 교육통계연보를 보면 전국 대학교에 입학한 여학생 수는 1970년 9523명, 1975년 1만5523명에서 1981년 4만7866명으로 크게 늘었다. 그런데 이들은 또래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이후 삶의 방식은 크게 달랐다.

흔히 중년 여성을 일반 기업에서 보기 힘든 이유로 유리천장, 조기퇴직 등을 꼽는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취직하는 것 자체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은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을 갖지 않고 바로 결혼하거나, 일을 하더라도 1~2년 후 임신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주부이자 드라마 칼럼니스트인 정석희(52) 씨는 이화여대 78학번으로 1980년대 초반에 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짧은 기간 교직생활을 하다가 전업주부가 됐다. 정씨는 “우리 세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회 분위기가 여성은 27세만 돼도 노처녀 취급을 했다”고 회상했다.

27세도 노처녀…대학 졸업 후 전업주부로

대졸 여성이 취업을 원해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1980년대 들어 고학력 여성이 갑자기 늘면서 이들을 다 받아줄 만한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았다. 공장 노동자, 봉제사, 미싱사 등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는 많았지만, 대졸 여성은 이를 원치 않았다. 주로 일을 하더라도 학교 교사를 하거나 간혹 대학교수가 됐다. 기자가 만난 취재원 상당수가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워낙 취업이 어려우니 교사를 꿈꾸지 않는 이도 너도나도 교사자격증을 취득했다”고 전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배은경 교수는 “직장에서 자아실현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여성들도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워낙 적으니 좌절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대학에서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사회 진출 문턱은 그 높이가 확연히 달랐다”고 설명했다. 취업 대신 결혼을 택한다는 뜻의 ‘취집’이라는 말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런 사회적 여건과 분위기 속에서도 취업에 성공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1984년 대기업에 입사해 현재 부장 직급까지 오른 이모(48) 씨는 “당시 ‘미스 리, 커피 좀 타오게’라는 말을 듣지 않은 여성은 없을 것”이라며 남자 동기와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한 기억을 떠올렸다.

“결혼을 하거나 특정 기간 안에 임신하면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는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사회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참고 살았다.”

김모(47) 씨는 이런 관행을 참지 못하고 직장을 나온 경우에 해당한다. 김씨는 대입 학력고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명문대에 입학한 수재였다. 큰 꿈을 품고 방송사에 입사했지만, 남자 동기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자 결국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들 대부분은 전업주부가 됐지만 이전 세대와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자신이 공부와 관련한 경험과 지식이 많은 만큼 자녀 교육에 적극 뛰어든다. 예를 들어 자녀가 저학년일 때는 직접 공부를 가르치거나 숙제를 두 팔 걷어붙이고 돕는다. 또 학교, 학원 앞에 차를 대기해놓고 아이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든지 유명 학원과 과외 교사 정보를 얻기 위해 애쓴다. 즉, 자녀 교육을 위해 스스로 연구하고 정보를 찾는다. 정석희 씨는 “남성은 사회활동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은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 교육을 책임졌다”며 “자신의 미래 대신 자식의 교육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더 과도하게 자식에게 집착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엄친아’를 키워낸 교육에 대한 열정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이 세대 여성들은 많은 교육을 받은 데다 이전 세대보다 가사노동 부담이 줄어 거의 모든 에너지를 자녀 교육에 집중한다”고 분석했다. 곽 교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통하는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게 된 것은 이들의 영향이 크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아시아계 사람이 공부를 잘하고 음악, 운동 계통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를 아시아계 엄마에게서 찾는다. 특히 한국 엄마가 그렇다. 공부, 특히 음악과 운동은 굉장한 연습량이 필요한데 한국 엄마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 자식이 이를 해내게 한다.”

또 요즘 여학생들이 ‘알파걸’로 불리며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40, 50대 엄마의 힘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석희 씨 역시 “나는 대학까지 졸업하고도 주부로 살고 비합리적인 관습도 견뎌냈지만, 내 딸은 나와 다른 삶을 살게 하고 싶다”며 “이런 생각을 하는 친구가 많다”고 전했다.

소비에서도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다른 성향을 보인다. 이들이 막 가정주부가 됐거나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1990년대 초반은 ‘프로주부’라는 개념이 유행하던 시기다. 프로주부는 ‘직장에서 일하듯 가사도 전문적으로 하며 가계, 가족의 건강과 성공 등을 똑 부러지게 책임지는 여성’을 뜻한다. 여기에 이 세대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경험까지 더해져 ‘사회의식이 높고 똑똑한 소비’를 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에코맘(Ecomom·환경 친화적인 살림을 하는 주부), 로하스(웰빙, 친환경, 합리성을 지향하는 소비자) 등이 유행하는 것도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대중매체에서 주목받은 또 하나의 주부 이미지는 ‘미시족’이었다. 미시족은 결혼은 했지만 외향, 가치관, 라이프스타일 등에서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여성을 의미한다. 당시 여성들의 자의식이 높아지고 경기 호황으로 소비가 활발해지면서 만들어진 개념. 광고에서는 ‘늘 애인 같은 아내’ ‘나는 미시, 미시는 다르다’와 같은 카피가 유행했고, 영화 ‘결혼 이야기’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 등을 통해 배우 심혜진이 미시족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다. 배은경 교수는 “당시 주부들은 아내, 엄마를 넘어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까지 유지해야 하는 부담이 늘어난 셈”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이 세대는 이전 세대와 비교해 ‘자기 관리’를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을 크게 아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멋진 엄마와 아내가 되려면 어느 정도 관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전업주부로 지내온 김윤희(48) 씨는 “30대 후반으로 보인다”는 기자의 칭찬에 “또래 친구들도 다 이 정도로 보인다”며 말을 이었다.

“피부 관리에 다들 굉장히 신경을 쓴다. 피부 레이저를 받는 경우는 흔하고 보톡스 주사, 주름 제거 수술 등에 대한 정보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다. 남편이 출장을 가면 명품 화장품을 사달라고 꼭 부탁한다. 중년 여성 대부분이 이미숙, 전인화, 김희애처럼 고운 피부와 미혼 여성 못지않은 날씬한 몸매를 갖길 원한다.”

인생의 경험 사회적 활용 방안 없을까

‘취집’간 그녀들 ‘프로주부’로 살다

중년 여성들은 끊임없는 자기 관리와 계발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옷도 ‘아줌마’처럼 입기를 원하지 않는다. 가방 디자이너 정덕주(52) 씨는 중년 여성만을 겨냥한 패션 브랜드는 잘 찾지 않는다. 젊은 여성들이 즐겨 찾는 심플한 스타일의 옷을 주로 구입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트렌드를 쫓아가는 데도 열심이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이모(48) 씨는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며 인터넷 카페, 블로그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그는 “동창회에 나가면 전업주부로만 살아온 친구들도 컴퓨터, 스마트폰 등을 다룰 줄 안다”고 말했다. 정석희 씨는 “신문이나 TV에서 새로 나온 기술, 트렌드를 소개하면 뒤처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관심을 갖게 된다”며 “기본적으로 나는 배우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고 했다.

중년 여성들은 대개 자식이 진학, 취직, 결혼 등을 통해 자기 길을 가게 되면서 정체성을 상실하는 일명 ‘빈둥지 증후군’을 앓는다. 전문가들은 특히 우리나라 주부들이 이런 증상을 더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세대는 상대적으로 이런 경향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자식에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지만, 끊임없이 다른 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왔기 때문. 다른 주부들과 교육, 재테크, 외모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그 예다. 오히려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여성도 있다.

이진아(52) 씨는 보통의 또래처럼 자녀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아이들이 밤을 지새워 공부를 하면 곁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잠을 쫓았다. 그러는 동안 뜨개질 실력이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고, 현재 뜨개질한 작품을 전시하고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다.

정석희 씨도 전업주부로 지내다 10년 전부터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집에서 주부로 지내는 동안 꾸준히 TV드라마를 보다 작가, 배우, PD의 전작을 비교, 분석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 것. 정씨는 “젊은 칼럼니스트들이 발랄하게 드라마를 분석하는 글이 많은 가운데, 오히려 나는 중년 여성의 시각에서 드라마를 분석하니 TV 방송이나 잡지 등 각종 매체에서도 찾는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KBS 시청자 비평 프로그램 ‘TV 비평 시청자데스크’에서 전문 패널로, 대중문화비평 웹진 ‘텐 아시아’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이들처럼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는 경우가 아니라도 봉사단체, 종교단체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거나, 무엇인가를 배우는 중년 여성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은 백화점 문화센터, 지역 문화센터 등에서 사진 촬영, 손바느질, 주얼리 공예, 바리스타 등 다양한 강의를 듣는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이들은 아예 소규모 모임을 만들어 전문 강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녀 교육에 몰두했던 에너지를 끝도 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쓰는 점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배 교수는 “깊이 있게 배운다기보다 문화센터를 옮겨 다니며 이것저것 배우는 것은 일종의 학원 쇼핑이자 낭비”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오랜 시간 직장 경력이 단절됐지만 교육 수준이 높고 인생의 경험도 풍부한 편이다. 사회적으로 활용할 만한 방안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주간동아 2011.02.14 774호 (p36~38)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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