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0

2010.08.16

나고야 소녀들에 미쓰비시 사죄하라!

13~15세 근로정신대로 끌려가 강제노동 … 돈 한 푼 못 받고 귀국 피눈물과 恨 여전

  •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입력2010-08-16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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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고야 소녀들에 미쓰비시 사죄하라!

    1944년 6월경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13~15세 소녀들. 한 소녀가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이라는 깃발을 들고 있다.

    #1. 전라도 나주의 소학교 6학년생이던 금덕이는 당찬 소녀였다. 1944년 5월 교장선생이 헌병과 함께 교실로 찾아왔다. “일본에서 중학교도 가고 집 한 채도 사고 싶은 사람 손 들어봐라.” 반 아이 모두가 손을 번쩍 들었다. 반장이던 금덕이와 키가 크고 몸집이 큰 여자아이 9명이 뽑혔다. 모두가 부러워했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이하 미쓰비시) 공장. “중학교는 언제 보내줍니까?” “일 열심히 하면 보내준다.” 소녀들은 군용 정찰기의 본체와 날개에 쉴 새 없이 페인트를 칠하고 부품에 낀 녹을 닦아냈다. 페인트 가루에 눈이 시리고 배도 많이 고팠다. 함께 일하던 친구 중에는 지진이나 공습으로 죽은 아이도 있었다.

    #2. 1945년 2월 전라도 순천의 순천남공립심상소학교. 일본인 오가키 선생이 6학년인 14세 소녀 정주를 불렀다. “일본에 가면 언니도 보고 공부도 할 수 있어.” 정주는 주저 없이 가겠다고 했다. 1년여 전, 오가키 선생의 말을 듣고 일본으로 떠난 언니가 그리웠기 때문. 그가 도착한 곳은 도야마의 후지코시 공장. 언니는 없고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숙소와 삭막한 공장뿐이었다. 새벽 5시 기상, 하루 8~10시간의 중노동. 식사는 빵 하나 정도로 부실했다. 배가 고파서 풀을 뜯어먹다 병에 걸리는 친구도 있었다. 일을 하다 다쳐도 작업대 앞에 서야 했다. 임금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언니를 만난 건 해방 후 고국에서였다. 언니는 청력을 거의 잃고 다리를 다쳐 거동조차 힘든 상태였다.

    연금 탈퇴 수당이 고작 99엔

    한일강제병합 100년, 광복 65년, 양금덕(82) 씨와 김정주(80) 씨는 80대의 노인이 됐다. 일제강점기 전시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미쓰비시 등의 군수업체에서 강제 징용한 13~15세 소녀들을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이하 근로정신대)라 일컫는다. 강제 동원된 근로정신대 피해자는 나고야 미쓰비시 300여 명, 도쿄 아사이토 누마즈 공장 300여 명, 도야마 후지코시 공장 1089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군위안부에 다녀왔다며 냉대를 받아야 했다.

    양씨를 포함한 근로정신대 피해자 8명은 1999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은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고도 임금은커녕 어떤 사죄와 배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11월, 10년의 투쟁 끝에 도쿄 최고재판소에서 돌아온 대답은 ‘기각’ 판결이었다. 주저앉은 그들을 붙잡아준 이는 나고야 시민 1100여 명이었다. 이들은 2007년 7월부터 매주 금요일 도쿄 미쓰비시 본사 앞에서 근로정신대에 대한 미쓰비시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시위를 해온 양심 있는 시민이었다.



    “세상에, 자장면 반 그릇 값도 안 되는 액수를….” 지난해 9월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보험청은 원고 8명이 후생연금에 가입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3개월 뒤 후생연금 탈퇴수당으로 1인당 99엔을 지급했다. 한국 돈으로 1250원, 이 터무니없는 액수는 국민에게 근로정신대 문제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과 이용섭 민주당 의원은 각각 국민 13만4162명, 여야 의원 100명에게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서명을 받았다. 올해 6월 미쓰비시 측에 서명용지를 전달하고 7월 15일까지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 테이블 구성에 참여할 것을 시한 통보했다. 시한 전날인 7월 14일 미쓰비시는 협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회신문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법원의 판단에 맡긴다며 협의에 불응했던 태도와 달랐다.

    나고야 소녀들에 미쓰비시 사죄하라!

    1944년 근로정신대로 미쓰비시중공업에 강제 징용된 양금덕 씨.

    8월 11일 ‘14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이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최근 미쓰비시의 태도 변화 등을 계기로 근로정신대 문제를 우리 정부와 사회에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였다.

    토론회 발표를 맡은 대한변호사협회 최봉태 변호사는 미쓰비시가 구체적으로 협의에 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쓰비시가 피해자 관련 단체의 의견을 통일해서 알려줄 것을 요구했고, 협의 진행 동안 미쓰비시 그룹회사를 대상으로 한 근로정신대 문제에 관한 메모 활동, 서명 활동 등을 삼가달라는 등 요구가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은 이번 미쓰비시가 일제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선례가 되길 바란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한·일 정부가 적극 나서야

    미쓰비시가 기업 차원에서 피해자와 화해를 한다 해도 일본 정부의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 지급 사태는 책임과 질타를 면할 수 없다. 후생연금은 1944년 일본이 전쟁자금을 충원하기 위해 만든 연금제도로 월급의 11%를 원천 공제했다. 거의 모든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가 이에 가입했다고 추측된다. 이들은 1990년대가 돼서야 후생연금이라는 것을 알았고 탈퇴수당을 요구했다. 하지만 후생연금은 탈퇴수당금 외에 퇴직 적립금을 비롯한 많은 보험급부를 받을 수 있으며, 이것은 배상·보상이 아닌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다. 대일항쟁기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정혜경 조사2과장은 “피해자들의 월급 액수, 일한 곳과 기간, 노동 중 부상한 경우 등에 따라 본인이 받아야 할 돈을 계산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탁금(아직 돌려받지 못한 임금) 이야기도 나왔다. 시민모임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일본은행에는 최소 4조 원대(2억3000만 엔)가 보관돼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3월 공탁금 명부를 한국에 전달했지만 돈은 줄 수 없다는 태도다. 최 변호사는 “일본의 최고재판부는 일본 정부의 책임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 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은 청구권을 상실했다며 공탁금을 포기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토론회 전날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토론회에서는 담화에 근로정신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 탈퇴수당금 99엔에 대한 사과 등이 빠졌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 한국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강한 비판이 제기됐다.

    이 의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 했던 이 사건이 논의되는 것은 나고야의 양심적인 지식인들로 구성된 ‘나고야 소송지원회’의 25년에 걸친 노고의 결실이다. 정부와 정치권, 언론, 국민의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김씨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일본 사람들이 ‘너희 정부는 뭐 하느냐’고 할 때였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재판에 참석하는 동안 우리 정부에서 해준 것은 없었다”며 울먹였다.

    대학생 인턴십을 지원하기 위해 국회에 들렀다는 24세의 여대생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근로정신대에 대해전혀 알지 못했다”며 “역사에 무관심한 20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광운대 김광렬 교수는 “강제동원에 대해 우리나라 교과서에 딱 2줄 쓰여 있다. 시급한 것은 우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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