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6

2010.05.10

살아 있는 나무 박물관 저마다 사연이 구구절절

관악산 생태숲길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10-05-10 09: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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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나무 박물관 저마다 사연이 구구절절

    안국사(오른쪽)에서 출발하는 관악산 생태 숲길은 소나무, 참나무, 계수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의 향연을 맛볼 수 있다.

    관악산은 서울의 금강산이다. 봉우리와 바위가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 따라 변하는 모습이 금강산과 같다고 해서 ‘소금강’ 혹은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해서 ‘서금강’이라 부른다. 서울의 명산으로 알려져 많은 등산객이 찾지만 아름다운 숲길이 조성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나와 서울대 후문 쪽으로 10여 분 걸어가면 왼쪽으로 낙성대공원이 나온다. 관악산 생태숲길은 관악산 자락의 숲길을 걷는 것으로, 크게 낙성대공원 관리사무소 앞 안국사에서 시작하는 1코스와 관음사에서 출발하는 2코스로 나뉜다. 두 코스 모두 1시간 남짓이면 돌 수 있으나, 숲 향기에 취해 걸음을 멈추고 숲의 대화에 귀 기울이다 보면 서너 시간은 훌쩍 걸린다.

    4월 29일, 예년 같으면 봄이 한창이지만 이상기온 탓에 바람이 쌩쌩 불었다. 거센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숲해설가인 산림문화콘텐츠연구소 김지현 기획위원과 함께 낙성대 1코스가 시작하는 안국사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낙성대(落星垈)는 고려시대 명재상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로,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73년 박정희 정부는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강감찬 생가 일대를 성역화했다. 본래 출생지는 현재 공원 터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코스가 시작하는 안국사 앞엔 주목나무가 중간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주목은 사시사철 푸른 나무로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을 살 정도로 생명력이 넘친다. 특히 바둑판 재목으로 최고인데 바둑돌을 놓는 순간 바둑판이 약간 꺼졌다 올라온다고 한다. 은행나무처럼 종자식물에서 암수의 생식기관 및 생식세포가 다른 개체에 생기는 암수딴그루 나무다.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고, 꽃과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이것이 암나무임을 안다.



    “저렇게 떨어져 있으니 서로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처음엔 둘이 오래된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공원 내 공사로 조경을 새롭게 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떨어지게 됐다. 사람들은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안 만나고 살기도 한다지만, 이 둘은 어떤 인연이었기에 오랜 세월을 함께하다 이처럼 떨어지게 된 것일까.

    주목나무를 바라보던 시선을 강감찬 장군 동상이 바라보이는 도로 건너편으로 옮겼다. 궂은 날씨에도 봄은 분명히 오고 있었다. 예년 같지 않은 날씨 탓에 ‘이렇게 봄이 지나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컸지만 나무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푸름을 뽐냈다. 같은 초록색은 하나도 없다. 어림잡아 꼽아도 20가지가 넘는 초록색의 스펙트럼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초록 물결에 눈을 씻고 안국사로 들어서면 벚나무, 소나무 등이 좌우대칭으로 자리 잡은 정원이 나온다. 인공미가 더해진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 형태로, 자연과 어우러진 한국식 정원이 아닌 것에 아쉬움이 남았다. 안국사를 절(寺)로 생각하기 쉽지만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이다.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소나무

    살아 있는 나무 박물관 저마다 사연이 구구절절
    때마침 천안함 사고로 귀중한 목숨을 잃은 46명의 장병을 애도하는 사이렌이 1분여간 울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묵념했다. 김지현 위원의 말이 폐부를 찔렀다.

    “1000여 년 전 거란족을 물리쳤던 강감찬 장군의 행적을 떠올리면,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지킬 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여 분간 안국사를 둘러본 뒤, 동쪽으로 난 작은 길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숲에 들어섰다. 흙에 발을 디디며 산길을 올라서는데 군데군데 앙상하게 드러난 소나무 뿌리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사람이 많이 오가면 흙이 다져져 이렇게 뿌리가 드러납니다. 비가 오면 흙이 쓸려 내려가고 토사가 유출되는 것도 이 때문이죠. 그래서 나무로 계단을 만드는 겁니다.”

    경사진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붉은 빛깔을 띠는 한국의 적송과 북아메리카산 리기다소나무가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앗! 따가워.”

    솔방울을 손에 쥐었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솔방울에 밤송이처럼 가시가 삐져나와 있었다. 리기다소나무의 솔방울로, 매끈한 적송의 그것과 비교됐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의 한국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면서 수탈을 당한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었다. 팔도강산 곳곳에서 나무가 베어졌는데 특히 상당량의 소나무가 일본으로 옮겨졌다. 이름마저 일본에 빼앗겼다. 일본이 먼저 세계에 알리고 등록하는 바람에 한국 적송의 학명은 ‘Japanese Red Fine’이다. 대신 민둥산을 채운 것은 일본의 아카시아와 리기다소나무다. 적송은 한군데에서 2장의 잎이 나오는 반면 리기다소나무는 3장이 나온다. 특히 나무 곳곳에 마치 사람의 털처럼 잎을 내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 20여 분 걸어가면 굴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등 다양한 참나무가 세찬 바람을 뒤로하며 어서 오라는 손짓으로 손님을 맞았다. 인간 생활사가 변하면서 숲 속의 주인도 조금씩 변해간다. 솔방울의 씨앗이 땅을 뚫고 자라려면 떨어진 잎이 치워져야 한다. 과거 나무는 물론 낙엽까지 연료로 쓸 때는 소나무 씨앗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점차 석유와 석탄 등 새로운 연료를 사용하면서 낙엽은 그대로 산에 쌓여갔고, 소나무 씨앗이 그것을 뚫기가 어려워졌다. 그 틈을 참나무 씨앗이 파고들었다. 햇볕을 덜 받더라도 자랄 수 있는 끈질긴 생명력의 참나무가 조금씩 소나무를 밀어내며 숲 속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참나무 숲과 전나무 길을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올라가면 해발 629m의 기암절벽 정상에 자리한 연주대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나온다. 연주대 위쪽엔 연주암이라는 작은 사찰이 유명하다. ‘연주암 중건기’ 등의 자료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했으며, 677년에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연주암이란 사찰 이름에 대해선 두 가지 유래가 전한다. 첫 번째는 고려 말 충신이었던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고려가 멸망하자 의상대에 숨어 살면서 멀리 개성을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그리워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조선 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하면서 40칸 규모의 건물을 지어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 위치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 이후 사람들이 두 대군의 심정을 기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부르게 됐다는 내용이다.

    이끼 속 작은 열대우림

    연주암의 전설을 뒤로한 채 발길을 낙성대 방향으로 돌렸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만큼 가파르진 않다. 박새와 쇠딱따구리의 앙증맞은 지저귐에 발맞춰 10여 분을 내려오면 안국사 둘레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계수나무 여럿이 누가 더 큰지 뽐내고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어릴 적 어머니 품 안에서 이 노래를 들어야만 편히 잠잘 수 있었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계수나무는 사랑의 나무이기도 하다. 낙엽에서 나는 ‘달고나’ 향기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계수나무 아래서 사랑을 고백하면 향기에 취한 탓인지, 계수나무의 아름다움에 빠진 탓인지 상대방은 안 넘어갈 수가 없다.

    살아 있는 나무 박물관 저마다 사연이 구구절절

    1 루페로 이끼를 보면 열대우림이 펼쳐진다. 2 리기다소나무는 나무 곳곳에 사람의 털처럼 잎을 내기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3 가시가 있는 리기다소나무 솔방울(오른쪽)과 매끄러운 적송 솔방울.

    발걸음을 멈추고 거울을 꺼내 코에 갖다 댄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낯선 각도에서 나무들이 춤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이 수평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땅 밑 작은 동물이 올려다보는 시각에서 나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잠시나마 인간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됐다.

    관악산 숲길여행의 대미는 루페가 장식했다. 루페는 10배로 확대해서 볼 수 있는 확대경으로 ‘늑대의 눈’이라고도 부른다.

    “어디가 좋을까요. 음, 저기 계수나무 아래 이끼가 가득한 곳이 좋겠네요.”

    김 위원은 엎드린 채 루페를 눈에 갖다 대며 먼저 시범을 보인 뒤, 루페를 건넸다. 손으로 흙을 쓸어낸 뒤 엎드려 조심스레 눈을 갖다 대자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영화 ‘아바타’ 속 판도라 행성의 거대한 열대우림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열대우림을 보려고 굳이 브라질 아마존 유역이나 태국의 열대우림 정글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냥 지나치는 이끼에도 생명은 시퍼렇게 살아 숨 쉰다.

    벅찬 감동을 가까스로 누르며 안국사 뒤편을 돌아나가면 출발 장소인 낙성대공원 관리사무소가 나온다. 출발하기 전만 해도 강하게 몰아붙였던 바람이 이젠 잠잠해졌다. 바람을 핑계 삼아 심란하게 흔들렸던 내 마음도 관악산 숲길을 거닐며 한결 안정됐다.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이외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1km 남짓의 짧은 숲길이었지만 나무 이야기에 흠뻑 취해 걷는 데만 2시간이 더 걸렸다. 관악산처럼 험한 등산로도 아니어서 가족과 함께 걷기에 좋다. 숲길을 걷고, 낙성대공원에서 정성껏 준비한 김밥을 먹는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Basic info.

    ☞ 교통편

    낙성대공원 위치 관악구 낙성대동 228번지 낙성대공원. 서울대 후문 뒷길로 걸어서 15분 소요,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에서 500m 거리.

    관음사 주변 위치 관악구 남현동 산57-48(이경직신도비)~산519-3(관음사) 일대. 지하철 2호선 사당역 5번 출구, 4호선 사당역 4번 출구에서 약 1.2km.

    ☞ 코스

    제1 코스 공원관리소 앞→연못→안국사→자작나무 숲→소나무 숲→참나무 숲→사시나무 숲→버즘나무 숲→안국사

    제2 코스 관음사 입구→이경직신도비→초화류 동산→누수식 생태연못→소나무 숲→잣나무 숲→상록수약수터→관음사에서 해산

    ☞ 숲 해설

    참가비용 무료

    운영기간 2010년 3월 6일~11월 30일

    운영일시 매주 토·일요일 10:00~12:00(약 2시간)

    참가대상 시민 누구나, 단체 참가신청 시 평일에도 운영

    참가인원 매회 코스별 30명 내외(선착순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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