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6

2010.05.10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반나절 5월의 꽃향기 날리고…

불암산 둘레길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0-05-10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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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반나절 5월의 꽃향기 날리고…
    ‘산에나 들어갈까.’ 헐레벌떡 준비해서 출근하고, 무거운 짐 지고 퇴근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떠나는 게 억울해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사실 산속에 우두커니 앉아 재미있게 살 자신도 없다. 이렇듯 이상과 다른 현실을 살며 늘 투덜대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혹시 불암산 인근에 사는 문인과 함께 산을 오르면 남다른 ‘감상’이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 노원구 주민인 소설가 구효서, 정지아 씨, 민음사 장은수 대표를 찾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거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할 수 없다. 혼자 몸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횡단형 건강 산책로 2km를 걷다

    4월 마지막 날 오전 10시, 덕암초등학교 앞에서 노원구청 공원녹지과 신현호 팀장과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에서 내려 아무리 물어도 이 학교를 아는 이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자, 5분도 안 돼 산 밑에 자리 잡은 아담한 학교로 데려다줬다. 불암현대아파트와 불암동아아파트가 보였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배에서 꼬르륵 신호가 왔다. 한참 걸어야 할 텐데 벌써부터 힘이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게에 들러 빵과 우유를 샀다. 크림빵을 입에 밀어 넣으려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불렀다. 신현호 팀장이다. 입 안 가득 빵을 넣고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그의 마음 씀씀이가 나를 더 민망하게 했다. 그의 손에는 내게 건넬 생수가 쥐어져 있었다.

    “이 길은 ‘넓은마당’에서부터 ‘넓적바위’까지 가는 2km 횡단형 건강산책로로 지난해 여름 개장했습니다. 불암산 둘레길 중 유일하게 재정비한 길이라 일반인이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불암산 둘레길은 총 20km에 이르는데, 6월부터 기존 등산로 노면을 다듬고 산책로를 연결해 만들 예정입니다. 그러니 지금 직접 가보실 만한 불암산 둘레길 숲길은 여기뿐입니다. 물론 노원구에 7개 노선이 있고 남양주시에 3개 노선이 있으니, 남양주시 쪽으로 가시면 가볼 만한 숲길이 있긴 하죠. 그렇지만 서울 쪽에서 갈 수 있는 불암산 둘레길 대부분은 다듬어지지 않은 오솔길이라 초행자가 찾아가긴 어렵습니다.”

    서울 노원구는 4월부터 2011년 말까지 총 6억5000만 원을 들여 남양주시와 함께 제각기 관리해오던 불암산 등산로와 산책로를 연결해 횡단형 둘레길을 조성할 예정. 그러나 현재 서울에서 걸을 수 있는 정비된 길은 2km뿐이다.



    일단 횡단형 건강산책로를 걸으며 높이 509.7m의 불암산(佛岩山)을 느껴보기로 했다. 불암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산으로 최고봉인 큰 바위가 마치 관을 쓴 부처의 형상 같다고 해서 천보산(天寶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인근의 먹골(묵동), 벼루말(연촌) 등의 지명과 함께 필(붓), 묵(먹), 연(벼루)으로 땅의 기운을 다스린다고 해 필암산(筆岩山)이라고도 부른다.

    불암산은 덕릉고개 남쪽에 높이 420m의 봉우리를 또 하나 거느린 산으로, 산 자체는 단조롭지만 거대한 암벽과 절벽이 어우러져 풍치(風致)를 자랑한다. 산 남쪽 사면에는 불암산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산에는 신라 지증국사(智證國師)가 세운 불암사와 그 부속 암자인 석천암(石泉庵)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무공(無空)이 세운 학도암(鶴到庵)이 있다.

    눈높이를 조정한 뒤 찾아온 마음의 여유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반나절 5월의 꽃향기 날리고…

    삼육대 안에 있는 ‘제명호’는 불암산 둘레길의 숨겨진 보석이다.

    그러나 대여섯 사람이 함께 갈 만한 폭의 건강산책로를 걸으며 불암산의 정기를 느끼기란 쉽지 않았다. 산 주변만 맴돌면서 본체를 파악하는 것은 사람의 옷차림만 보고 본심을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20여 분을 그렇게 감흥 없이 걷자 눈높이를 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복궁을 지을 때 채석장으로 쓰기도 했다는 불암산을 걸으며 산의 너른 품을 제대로 느껴보기로 했다.

    욕심을 버리자 신기하게도 산의 아름다움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 나무와 꽃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길쭉한 잣나무들을 보면서 추진력을 배울 수 있었고, 주민들이 생성약수터에 붙여놓은 타일을 보며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배꽃과 하얗게 늘어진 이팝나무를 보며 낭만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고, 불암산의 명예 산주(山主)인 탤런트 최불암의 시비를 보며 겸손한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벌레 때문에 잘려나간 신갈나무를 보며 물러서는 것이 이기는 길일 수도 있음을 마음에 새겼다. 절에 오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달아놓았을 연등을 보며 소망의 중요성도 새삼 깨달았다. 정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열심히 운동하는 주부들, 한 구간을 오가며 운동에 매진하는 강아지, 봄날을 만끽하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노인들 모두 저마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불암산 둘레길 숨겨진 보석 ‘제명호’

    불암산 둘레길에 있는 숲길은 현재 넓은마당에서부터 넓적바위까지 2km 횡단형 건강산책로뿐이지만, 이 둘레길 안에는 이미 만들어진 도로가 포함돼 있다. 도로는 원자력병원에서 서울여대, 육군사관학교, 태릉선수촌을 지나 삼육대 입구로 이어진다. 우리는 차를 타고 이 길을 이동해 삼육대 입구에서부터 걸었다. 한전연수원을 통과하면 불암산 자체의 둘레를 잇는 길을 만들 수 있지만,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잠든 태릉은 문화재 보호구역이라 둘레길에 포함되지 않았다.

    삼육대 입구를 지나 학교 숲길을 10여 분 오르다 보면 공해에 대한 저항성이 약해 도심지 주변에서는 생육이 불가능하다는 서어나무(일명 근육나무)가 기울어진 채 인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길을 2~3분 더 오르면 학교를 세운 이제명 목사의 이름을 딴 인공호수 ‘제명호’와 만날 수 있다.

    제명호는 불암산 둘레길에 숨겨진 보석이다. 폭이 100m는 돼 보이는 타원형의 이 호수는 연인이 손을 잡고 7번 오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신한 푸른 물빛에 비단잉어가 뛰노는 모습은 생과 사의 경계에 놓인 것처럼 신성하고 고요하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정갈하게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이 호수처럼 삶이 풍요롭게 마무리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불평불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명호는 평범한 삶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자, 삶의 목표와도 같아 보였다.

    짧은 길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허세겠지만 삶이 곧 둘레길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남다른 성과물과 장애물이 없어 지루해 보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조금씩 다른 현실을 맞이하고, 그 안에서 나를 키우는 자양분을 만나는 배움의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어떤 이의 인생이든 나름의 가치가 있다 말하는 둘레길의 가르침 덕분인지 살아가는 자세가 조금은 밝아진 것 같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툴툴 털고 일어나 씩씩하게 걸어갈 힘을 얻는다.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반나절 5월의 꽃향기 날리고…

    1 불암산 명예 산주인 탤런트 최불암 씨가 쓴 시가 적힌 시비. 2 소풍 나온 어린이들. 3 불암산에서 가벼운 차림으로 둘레길을 걷는 주민들.

    Basic info.

    ☞ 교통편

    넓은마당 주변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에서 걸어서 15분 소요, 덕암초교 부근.

    삼육대 입구 위치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또는 석계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삼육대행 버스를 이용.

    ☞ 코스

    불암산 둘레길(20km) 넓은마당→넓적바위→회춘샘약수터→공릉2단지→삼육대 입구→삼육대 갈림길→불암사 입구→불암터널→덕능고개→넓은마당

    불암산 하루길(12km) 넓은마당→넓적바위→회춘샘약수터→삼육대 갈림길→불암사 입구→불암터널→덕능고개→넓은마당

    불암산 나절길(8km) 회춘샘약수터→공릉2단지→삼육대 입구→삼육대 갈림길→회춘샘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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