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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재일 민단! 일본으로 귀화해 ‘성공한 한국계’로 살아가자”

日 최대 파친코 재벌 마루한 한창우 회장 “민족 자부심과 국적은 별개 문제”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재일 민단! 일본으로 귀화해 ‘성공한 한국계’로 살아가자”

“재일 민단!  일본으로 귀화해 ‘성공한 한국계’로 살아가자”

민단으로부터 ‘매국노’ 소리를 들으면서도 민단 회원들의 일본 국적 획득을 주장하는 마루한 한창우 회장.

‘마루한’은 연 매출 30조원이 넘는 일본 최대의 파친코 그룹인데, 그곳 총수가 한창우(韓昌祐·79) 씨라는 것은 제법 알려진 사실이다. 한 회장은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과 더불어 일본 국적의 성공한 한국계 재벌로 꼽힌다. 그런데 그는 유독 구설에 휩싸일 때가 많다. 민단을 구성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을 향해 “일본 국적을 취득하라”고 떠들고 다니기 때문.

그는 ‘아사히신문’에 ‘본명으로 귀화하자’는 글을 투고한 바 있다. 이 일로 ‘특별영주권’을 갖고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자의 모임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에서 그를 제명 처분했다. 일본에는 민단 기업인이 주축을 이룬 ‘재일한국상공회의소’가 있는데, 그는 귀화한 한국인들이 중심이 돼 만든 ‘재일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을 지원하고 있다.

“재미동포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가. 미국 시민권을 따서 미 재계와 정계, 언론계에 진출한 사람을 ‘성공한 한국계’로 보듯, 이젠 우리도 일본 국적을 갖고 일본 구석구석에 진출해 성공한 한국계가 돼야 한다. 일본인 앞에서는 차별받을까 두려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감추면서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한국인을 강조하진 말자. 떳떳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밝히고 성공한 일본인으로 살아가자”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국 정부는 민단 지원금 끊어라”

현재 민단은 한국 정부로부터 매년 70억원 정도를 지원받는다. 이에 대해 그는 “왜 어려운 아버지(한국 정부)에게 돈을 받느냐. 이제 아들(재일동포)도 다 컸으니 오히려 아버지를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한국 정부에 민단 지원금을 중단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민단이 개혁을 이루려면 자생력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 정부의 지원금 때문에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재일 한인 사회의 풍운아인 한 회장은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특별보좌관 등 상당수 한국 요인과 친밀하게 지낸다. 모교인 삼천포초등학교에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등 고향을 위한 기부도 적지 않게 하고 있다. 지인을 문상하기 위해 잠시 서울에 온 그를 만나 일본 귀화론을 주장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들어봤다.

그가 9세이던 1939년 11월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제했다. 이듬해 청주 한씨인 그의 아버지가 성을 ‘니시하라’로 바꿨기에 그의 이름은 니시하라 마사히로(西原昌祐)가 됐다. 광복 후 그는 한창우란 이름을 되찾았으나, 17세이던 1947년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다시 니시하라 마사히로를쓰게 됐다.

이듬해 그는 명문 호세이(法政)대학에 들어가 5년 만에 졸업했다. 그가 졸업할 무렵 일본은 구직난이 심각해 외국인인 그는 취업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훗날 그의 자형이 된 이가 교토(京都) 외곽의 미네야마에서 운영하던 파친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1953년). 명석한 그는 파친코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금세 터득해 가게를 인수했다.

6·25전쟁 특수로 일본 경제가 살아나자 일본인들은 조금씩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소리에 민감한 귀를 가져 음악을 좋아하던 그는 1957년 클래식 레스토랑을 열었는데, 이 가게가 큰 인기를 끌었다. 같은 해 그는 고베(神戶)제강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둔 18세의 일본 아가씨 스즈키 나가코를 만났고, 사귄 지 두 달 만에 ‘조센진(朝鮮人)’임을 고백했다. 스즈키 집안의 냉랭한 반응을 이겨내고 결혼해(1958년) 첫아들을 낳은 그는 민족의식이 강렬했던지라 아들에게 ‘한철(韓鐵)’이라는 한국 이름만 붙여줬다. 이를 시작으로 슬하의 5남2녀는 모두 한씨 성의 한국식 한자 이름을 갖게 됐다.

그는 거류민단 활동도 열심히 해, 1970년엔 민단 교토본부 부단장이 됐다. 그의 차남인 한유(韓裕) 씨는 교토상고 야구선수였는데, 당시 그 야구부에는 ‘정소상’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선수와 일본 이름을 쓰는 재일교포가 있었다. 1981년 그의 차남이 뛴 교토상고 야구부는 고시엔(甲子園)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교토상고 야구부가 파죽지세로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매 경기마다 전광판에는 누가 봐도 한국 이름임이 분명한 ‘한유’와 ‘정소성’이란 글자가 새겨졌다. 그런데 결승에서 만난 호토쿠(報德)고교에도 일본 이름을 쓰는 재일교포 선수가 4명 있었다.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고시엔대회 결승전에 한국 이름을 쓰는 2명을 포함해 교포 학생이 7명이나 출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재일교포 사회는 열광했다.

이 영광을 겪은 후 그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은 몰라도 아이들은 일본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깨닫고, 아이들의 국적을 전부 일본으로 바꾸기로 한 것. 그러나 한국계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며 한국 이름 그대로 귀화하게 했다.

1984년 교토의 한국상공회의소장에 선출된 그는 이듬해 열린 신년회에서 “민족 자부심을 갖는 것과 국적을 바꾸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재일교포 사회는 일본 국적을 취득할 시기를 맞이했다”는 요지의 ‘폭탄 발언’을 했다. 아무도 그의 말에 박수를 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적잖은 교포 사업가들이 일본의 법을 어겨가며 사업을 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런 행동 때문에 우리가 차별받는 것이다”라며 민단의 개혁을 역설했다.

‘한창우’ 이름 그대로 귀화

이때까지 그는 회사 이름을 자신의 일본식 이름의 성을 따 ‘니시하라(西原)산업’이라고 했다. 그런데 회사가 파친코 시장에서 수위를 다투게 되자, 그는 미네야마에 있는 본사를 교토로 옮기면서 개명을 시도했다.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 그는 지구도, 파친코의 구슬도, 볼링공도 둥글다는 데 착안했다. 일본어로 ‘둥글다’는 ‘마루(丸)’인데, 여기에 자신의 성인 ‘한’을 붙여 마루한을 새 이름으로 정했다(1988년).

민단 개혁을 외치던 그는 1991년 교토 민단장 선거에 도전했으나 근소한 차로 패했다. 승리를 자신한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아픔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민단 개혁에 대한 꿈을 접고 마루한을 동종업계 최고로 키우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2000년 그도 귀화했다. ‘韓昌祐’를 일본어 음독(音讀)으로 읽으면 ‘간쇼우유’인데, 그는 한국 발음인 ‘한창우’로 읽는 것을 조건으로 귀화를 결정했다. 그래서 그의 일본 여권엔 영어 이름이 Chang-Woo Han으로 표기돼 있다.

그는 자신의 발음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일본 관리에게 “일본 헌법에 사람 이름의 한자를 반드시 일본어로 읽으라고 돼 있는가. 일본 국적법이 일본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가”라고 따져 말문을 막아버렸다. 이는 손정의 회장과는 다른 선택이다. 손 회장은 ‘孫’자의 일본어 음독이 같은 ‘손’이라는 데 착안해 ‘孫正義’란 이름 그대로 귀화했으나, 발음은 일본어 훈독인 ‘손마사요시’로 읽게 했다.

그의 마이웨이는 계속된다. “광복한 지 60년이 지났고, 한국도 이제 원조국으로 발전했으니 더 이상은 과거 문제에만 얽혀 일본을 바라보지 말자”는 게 그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주간동아 2009.12.22 716호 (p60~61)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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