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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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보르도 와인의 맛!

  • 조정용 ㈜비노킴즈 대표·고려대 강사

    입력2008-12-22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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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옛적 보르도 와인의 맛!

    19세기 와인 스타일의 진수를 보여주는 샤토 팔머의 와인.

    샤토 팔머는 골프의 아놀드 파머만큼이나 유명하다. 보르도 와인기행에서 맨 처음 방문한 곳이라 각별한 정도 있다. 보르도 마고 마을에 자리한 샤토 팔머는 마을의 간판 양조장 샤토 마고 다음가는 우수한 테루아(토양)를 자랑한다.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 마중 나온 이는 전 세계를 돌며 양조장 홍보를 하는 마케팅 책임자 베르나르다. 그는 나를 동네 레스토랑으로 안내하며 몇 가지 빈티지의 샤토 팔머를 맛보게 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서울 논현동의 레스토랑 자르디아니로 초대했다. 며칠 전 우연히 접한 글을 통해 샤토 팔머에서 특이한 와인을 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곧장 그에게 맛보고 싶다는 뜻을 담아 글을 보냈다.

    맛보기를 열망한 와인은 ‘19세기 와인’이다. 19세기 와인이라니…, 19세기에 만든 걸까? 19세기에 만든 와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게 아니라 19세기에 만들던 스타일의 와인을 뜻한다.

    19세기 스타일의 와인이란 어떤 와인일까. ‘별다른 스타일이 있을까?’ 하고 반문할 만하다. 현재의 시선으로 와인을 바라보면 이게 다인가 싶어도, 기실 와인은 긴 시간 속에서 변화해오고 있다.



    과거에는 스타일이 달랐다. 지금이야 보르도 와인이면 포도는 응당 보르도에서 길러야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가져다 와인을 만들어도 상관없었다. 당시엔 원산지 개념이 없었다.

    19세기 보르도 와인은 묽었다. 오늘날의 것처럼 진하고 풍부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한편 남프랑스 와인은 진했다. 특히 론밸리의 에르미타주 마을은 강건하고 풍성한 맛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지방 토속품종 시라가 확실한 맛을 주는 와인을 만들고 있었다.

    다른 지방 포도와 섞는 19세기 스타일

    이런 스타일은 오늘날까지도 이 지방의 전통적인 맛으로 유지되고 있다. 보르도의 양조장들은 남부에서 키운 시라를 혼합해 강하고 진한 맛을 만들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무분별한 품종 간 혼합은 유명 양조장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1등급 와인에서조차 에르미타주 와인을 섞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샤토 팔머가 여러 고객과 얘기하던 중에 전통 와인을 재현해보면 어떨까 싶어 몇 년 전부터 19세기 와인을 시험적으로 만들었다. 4배럴 분량이고, 완성된 와인 전부는 미국과 일본에 값비싸게 팔려 나간다.

    이런 19세기 와인을 시음했다. 베르나르가 직접 가져왔다. 12%의 시라가 섞여 있고, 나머지는 알다시피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다. 이 와인의 초콜릿 향취가 매우 감미롭다. 자줏빛 생동감 깃든 빛깔이다. 카베르네, 메를로, 시라의 아름다운 3중주가 조화롭다. 질감이 비단결 같으면서 디테일을 느낄 수 있으며, 마시기에 참 좋다. 시라 특유의 스파이시한 뉘앙스와 이국적인 향취가 드러난다.

    베르나르가 직접 챙겨온 와인은 그와 마시다 남았는데, 그걸 셀러에 두고 가끔 꺼내 맛보다가 어느 날 선배와 바닥을 보았다. 그런데 날짜를 따져보니 한국에 온 날로부터 3주가 지나 있었다. 그러나 와인의 생동감은 유지됐다. 개봉한 지 3주라….

    라벨을 자세히 읽어보라. 샤토 팔머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구성이다. 빈티지가 없다. 이 와인의 등급은 뱅 드 타블, 즉 테이블 와인이다. 다른 지방 포도를 섞었기 때문에 해당 지방의 원산지 명칭을 사용할 수도, 빈티지를 표시할 수도 없다. 하지만 맛은 기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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