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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 한심한 독도 역사 지우기

한국산악회 표석 ‘리앙쿠르’ 글자 때문에 철거 … 3년 전 복원, 쓰면 뱉는가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경북도, 한심한 독도 역사 지우기

경북도, 한심한 독도 역사 지우기
경상북도(이하 경북도·도지사 김관용)와 한국산악회가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역사 지우기’를 시도한 사실이 밝혀졌다. 경북도가 한국산악회의 동의를 얻어 독도 동도(東島) 자갈마당의 한 바위 위에 설치한 한국산악회의 독도 영토 표석(標石)을 철거해버린 것.

이유는 이 표석에 ‘리앙쿠르(Liancourt)’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리앙쿠르 때문에 표석을 제거했다는 것은 표석 철거를 담당한 경북도 실무자와 경북도의 철거 요청에 동의한 최홍건(65) 한국산악회장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경북도·한국산악회 “참으로 난감한 상황”

경북도는 리앙쿠르 논쟁이 벌어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 이 표석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표석을 제거한 뒤 경북도와 한국산악회는 이 사실을 철저히 감추려 했다. 리앙쿠르 논쟁 때문에 표석을 없앴다면 이를 자랑스럽게 공개했어야 하는데 반대로 결사적으로 비밀화한 것. 이러한 사실은 기자가 “왜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을 없앴느냐?”고 묻자, 경북도와 한국산악회 측 모두 우물쭈물하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하거나 “참으로 난감하게 됐다”며 당황해한 것으로도 간접 확인할 수 있었다.

리앙쿠르 논쟁은 7월14일 캐나다 토론토대학 동아시아도서관의 한국학 책임자 김하나 씨가 주미 한국대사관에 “미국 의회도서관이 독도를 의미하는 장서 분류 주제어를 ‘독도(Tok Islands)’에서 ‘리앙쿠르 암(Liancourt Rocks)’으로 바꾸는 회의를 7월16일 열려고 한다”고 제보하면서 불거졌다. 이 제보에서 김씨는 “미국은 독도를 일본해(日本海)에 있는 섬으로 표기하려 한다. 미 의회도서관 회의는 미국 국립지리원(NGA)과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 지명을 리앙쿠르 암으로 바꾼 데 따른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김씨의 제보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자 한국에서는 이를 강력히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미 의회도서관은 다음 날인 7월15일, 독도 주제어를 리앙쿠르 암으로 변경하기 위한 회의를 보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반전의 기미가 보인 것이다. 김씨가 언급한 미 지명위원회는 1977년 7월14일 이전까진 독도를 ‘독도’로 표기했지만 이후부터는 ‘리앙쿠르 암’으로 표기해왔다. 이러한 미 지명위원회가 2008년 7월30일부터 독도 영유권을 ‘미지정’, 독도 위치를 일본해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미 의회도서관 회의를 중단시킨 한국 여론은 곧바로 미 지명위원회를 향했다. 이태식 주미대사까지 나서서 총공세를 펼치자, 방한을 앞둔 부시 미국 대통령은 원상복귀를 지시했다. 그로 인해 미 지명위원회는 독도를 직전 상태인 ‘한국 영유권 보유’와 ‘공해상 위치’로 돌려놓았다. 독도의 이름은 리앙쿠르 암으로 적고, 그 옆에 독도와 다케시마(竹島)를 부기한 것. 미 국립지리원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보름여 동안 계속된 리앙쿠르 논쟁은 일단락됐다.

경북도, 한심한 독도 역사 지우기

2008년 8월15일 경북도가 독도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한 인사가 찍어온 독도 자갈마당 부근 사진(위)과 3년 전 경북도가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과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를 복원한 후 찍은 사진(위에서 두 번째)을 비교해보면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이 사라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독도의용수비대가 세운 대한민국 영토 표석. 2. 2005년 8월15일 복원한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 3. 경북도가 복원한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리앙쿠르 암은 1849년 동해를 항해하다 독도를 발견하고 처음으로 국제 해도(海圖)에 이를 올린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대한민국 영토임이 분명한 만큼 국제 해도에도 독도로 표기돼 있어야 하나, 유감스럽게도 국제 해도에는 리앙쿠르 암으로 기록돼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리앙쿠르 암은 일본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독도를 가리키는 일본 이름은 다케시마. 따라서 일제강점기 때는 물론이고 최근에도 독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독도를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할 경우엔 ‘독도=리앙쿠르 암’으로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리앙쿠르 암’은 우리를 만족시키진 못해도 독도를 일본에 헌납하는 이름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경북도와 한국산악회는 민족감정에 치우쳐 이러한 사실을 간과해버렸다.

한국산악회, 영문 이름 틀렸다는 이유로 표석 철거 동의

울릉군을 거쳐 독도를 관할하는 경북도청은 독도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독도 지킴이’라는 조직을 운영해왔다. 그런데 7월13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학생 사회과 학습지도 요령 해설서에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을 넣기로 결정하고 7월16일 미국에서 리앙쿠르 논쟁이 일자, 7월18일 황급히 독도 지킴이를 ‘독도수호대책본부’(본부장 김남일)로 확대 개편했다.

그리고 독도수호대책본부가 독도 사태에 첫 번째로 내놓은 대책이 바로 리앙쿠르라는 글자가 새겨진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을 철거한 일이었다. 이 표석 앞면에는 맨 위에 한글로 크게 ‘독도’, 중간에 한자로 작게 ‘獨島’, 맨 아래에 알파벳으로 ‘LIANCOURT’가 새겨져 있었다. 한국산악회는 국제 해도에 리앙쿠르 암으로 표시된 이 섬의 원래 이름이 한글로는 ‘독도’이고 한자로는 ‘獨島’라는 뜻에서 이렇게 새겨넣었다.

한국산악회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한-일 양국이 독도에 상륙해 몸싸움을 벌이던 1953년 이 표석을 독도에 설치했으나, 일본 측은 바로 독도에 상륙해 이 표석을 철거해버렸다. 그 뒤 이 표석이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졌다. 그런데 기자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다케시마 날’을 제정해 올해보다 독도 영유권 논쟁이 더 치열하던 2005년 3월, 이 표석을 설치할 때 찍었던 사진들을 찾아내 2005년 3월15일자 ‘주간동아’(427호)를 통해 처음 공개했다. 기자가 찾아낸 자료 중에는 ‘이 표석의 넓이는 두 자가량, 높이는 자가웃, 부피는 한 자 조금 못 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덕분에 경북도는 2005년 8월15일, 이 표석과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사라진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를 함께 복원해 재설치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최근 리앙쿠르 논쟁이 일자 황급히 자신들이 복원한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을 철거해버린 것이다. 2005년에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 자랑스럽게 복원한 역사를 2008년에는 리앙쿠르란 단어가 든 표석을 복원했다는 이유로 불똥이 튈까 싶어 부숴버린 경북도, 그리고 그러한 경북도의 행동에 동의한 한국산악회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이들은 역사까지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것인가.

한국산악회-독도 끊을 수 없는 인연

1947년 송석하 회장 탐사비용 대고 영토 푯말 설치


경북도, 한심한 독도 역사 지우기

1953년 독도 자갈마당에 영토 표석을 설치하는 한국산악회의 홍종인 회장. 한국산악회는 한국이 영유권을 보유한 독도라는 뜻으로 맨 위에 큰 글씨로 한글 ‘독도’를 새기고, 이어 작은 글씨로 한자 ‘獨島’를, 그리고 맨 아래에 알파벳으로 ‘LIANCOURT’를 새겼다.

‘리앙쿠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을 철거한 경북도의 행동은 이 표석에 담긴 역사성을 무시한 ‘폭거’다.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에는 광복 및 6·25전쟁 직후 치열하게 전개된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다툼 역사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독도를 지켜내고자 한 선배들의 시대정신이 녹아 있다.일본이 시마네현 고지(告知)를 통해 독도를 그들 영토에 편입시킨 것은 1905년 2월22일. 그러나 한국은 그해 체결된 을사늑약에 따라 일제의 보호국이 됐고, 1910년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독도를 우리 영토로 주장할 수 없었다.

독도를 연구해온 학자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와 함께 ‘리양코 시마(リヤンコ島)’로 적는 사람들이 있었다. 리양코는 리앙쿠르를 일본어로 적은 것이다. 이 시기 한국인은 ‘죽어도’ 독도를 다케시마라고는 부르기 싫어했고 독도로는 적을 수 없어 ‘리앙쿠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이러한 상태에서 찾아온 것이 1945년 8월 광복이었다. 패전한 일본은 연합군 총사령부의 군정을 받았다. 맥아더 원수가 이끈 이 사령부는 일본 접수 직후인 1945년 9월2일, 일본 어민들이 배를 타고 나가 조업할 수 있는 한계선(일명 맥아더 라인)을 발표했는데, 이 선 안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은 이 결정에 환호했다. 그러나 매우 가난했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 군정하에 있어 독도 영유권을 확인하기 위해 배 한 척 띄우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 패기 있고 유능한 한국의 엘리트들이 모인 단체가 바로 조선산악회였다.조선산악회 송석하 초대 회장은 재력가였다. 1947년 최희송 당시 경북도지사가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자는 발의를 하자, 미 군정하의 과도정부 수반인 안재홍 민정장관이 결심하고 송 회장이 출연함으로써 ‘드디어’ 실현된 것이 독도 탐사다. 독도 탐사는 송 회장이 자금을 댄 만큼 조선산악회가 맡았다.

조선산악회는 조선해양경비대의 대전환(丸)을 타고 1947년 8월29일 독도에 상륙해 ‘朝鮮 慶尙北道 鬱陵郡 南面 獨島(조선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라고 쓴 푯말을 세웠다.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연합군 사령부가 독도를 일본 어민의 조업선 바깥에 놓은 데는 일본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미군은 독도를 폭격기의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 이러한 미군의 행동이 독도 영유권을 외치는 한국인의 열의와 충돌해 엄청난 사태를 일으켰다. 1948년 6월8일의 ‘독도 참사’가 그것이다.

그날 울릉도와 강원도 주문진 등지에서 온 한국 어민들은 독도에 상륙해 미역을 따는 등 조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 이륙한 미 5공군 소속 B-29 편대가 독도 상공으로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그로 인해 한국 어민 14명이 숨지고, 십수 명이 부상하는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났다.미 5공군은 주한미군을 통해 희생자 가족에게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위로금을 지불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당시 한국인에게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은 거금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왜 미군이 한국의 영토임이 분명한 독도 상공에 날아와 마음대로 폭격 연습을 했는지를 끈질기게 성토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국민 여론을 담은 것이기에 많은 국민의 공감을 얻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다음인 1950년 6월8일 조재천 경북도지사가 독도를 방문해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어민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올리고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도 세웠다.


조선산악회 해양경비대 함정 빌려 타고 독도행

경북도, 한심한 독도 역사 지우기

1953년 독도에 상륙한 한국산악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갈마당에 박혀 있던 일본의 영토 표주(標柱)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일본의 영토 표주에는 ‘시마네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를 뜻하는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17일 뒤 6·25전쟁이 터지면서 한국은 더 이상 독도 문제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戰犯) 국가이기에 한국보다 훨씬 오랫동안 미 군정을 받았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는 1952년 4월28일까지 일본에 대한 군정을 유지하기로 했다.

강화조약 발효일이 다가오자 일본 엘리트들은 앞 다퉈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다. 한국은 상륙하지 말라”는 협박성 발언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다. 강화조약 발효 직전인 1952년 1월18일, 일본 어선이 절대 넘어와서는 안 되는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선포하고 이 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켰다.

이에 대해 일본이 거세게 항의하자 이 전 대통령은 해군과 해경에게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배가 있으면 발포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강화조약이 발효되자 ‘기다렸다는 듯’ 일본 어선들은 평화선을 넘어왔고 한국 해군과 해경은 평화선을 넘어온 일본 어선을 나포했다. 이러한 때 일본은 평화선을 무력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선포하는 일에 착수했다.

1952년 6월25일경 일본 해상보안청과 수산청 소속 공무원들이 무단으로 독도에 상륙해 조업하던 한국 어민들을 쫓아내고, 다케시마가 일본의 영토임을 보여주는 나무 말뚝을 박았다. 일본 공무원들이 돌아가자 쫓겨났던 어민들은 다시 독도로 들어가 이 말뚝을 뽑아 배에 싣고 울릉경찰서를 찾아가 “일본인들이 이런 짓을 하며 조업을 방해하는데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성토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독도 영유권을 확실히 하라는 농성을 벌인 것.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자 한국 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북한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이라 직접 나서진 못하고, 1947년 독도에 영토 푯말을 박아 넣은 조선산악회의 후신인 한국산악회에 대응책을 맡겼다. 한국산악회는 광복절인 8월15일 독도에 영토 표석을 세우기로 하고 화강암으로 표석을 만들었다.이러한 한국의 노력에 제동을 건 쪽은 미군이었다. 한-일 간 독도 분쟁을 의식한 주한 미군사고문단은 한국 해군에 압력을 넣어 한국산악회가 타고 갈 배를 제공하지 못하게 했다. 그로 인해 일정이 늦춰져 1952년 9월17일 한국산악회는 교통부 부산해사국 소속 등대 순항선인 진남호를 타고 ‘간신히’ 부산항을 출항했다. 진남호는 사흘 후 독도에 접근했는데 그때 미군 전투기들이 날아와 독도를 폭격했다. 깜짝 놀란 산악회는 이 사실을 국방부와 내무부로 타전하고 울릉도로 피신했다.

연락을 받은 국방부와 내무부는 미군에게 “왜 독도를 폭격했느냐”고 따졌으나, 미군 측은 “독도를 폭격한 사실이 없다”고 잡아뗐다. 이틀 후 진남호는 다시 독도에 접근했는데 이때도 정체불명의 전투기가 나타나 독도 주변을 폭격했다. 그로 인해 한국산악회는 표석을 울릉경찰서에 맡기고 부산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날씨가 추운 겨울철에는 누구도 독도에 상륙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울릉도 어민들은 다시 독도에서 조업을 했다. 그러자 해상보안청과 수산청 배를 타고 온 일본 공무원들이 독도에 들어와 이들을 내쫓고 다시 말뚝을 박았다. 이때 일본 공무원들은 1947년 조선산악회가 세운 영토 푯말을 뽑아내 파괴했다. 그러나 일본 공무원이 독도를 떠나면 울릉도 어민들은 독도에 들어가 일본인들이 박은 말뚝을 뽑아냈다. 일본의 말뚝 박기와 한국 어민의 말뚝 뽑기 전쟁이 치열하다는 보고를 받은 한국 정부는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이때 국방부와 외교부가 공동으로 추진한 일이 1952년 미군의 위협 폭격으로 좌절된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을 다시 설치하는 것이었다. 한국산악회는 홍종인 회장을 중심으로 36명의 조사단을 꾸렸고, 국방부는 해군에게 함정을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국산악회 조사단은 10월11일 부산항에서 해군의 905정을 타고 출항해 13일 독도에 접근했으나, 악천후로 접안에 실패했고 14일 새벽에야 독도에 상륙했다.


1952년 독도 들어가려다 미군 폭격으로 무산

경북도, 한심한 독도 역사 지우기

2005년 중소기업특별위원회가 열렸을 때 위원장 자격으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안내했던 최홍건 현 한국산악회 회장(왼쪽),올해 7월17일 현판식을 가진 경북도청 소속 독도수호대책본부는 ‘리앙쿠르’라는 표현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3년 전 경북도가 복원한 한국산악회의 독도 영토 표석을 비밀리에 철거했다(오른쪽).

조사단을 이끈 홍종인 한국산악회장은 표석을 설치한 뒤 ‘조선일보’에 관련 르포를 연재했다. 이 르포에 따르면, 1차로 독도 접안을 시도한 10월13일 905정 부근에 레이더 장비를 갖춘 일본 해상보안청의 순시선 ‘나가라(250t)’함이 접근해왔다고 한다. 평화선을 침범한 것이다. 이에 905정장 서덕균 대위는 곧바로 ‘총원 전투 배치’ 명령을 내리고 나가라함을 평화선 밖으로 밀어냈다.

독도에 상륙한 조사단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라고 쓰인 2m 넘는 일본의 영토 표주(標柱)였다. 島根縣은 ‘시마네현’, 隱地郡은 ‘오키군’, 五箇村는 ‘고카무라’, 竹島는 ‘다케시마’이니 이 말뚝은 독도를 일본 시마네현 오치군 고카무라 소속의 다케시마라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지금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현 오키(隱岐)군 고카무라’ 소속의 다케시마로 부른다. 1969년 시마네현은 오치군을 오키군으로 확대 개편했기에, 69년 이전은 오치군 고카무라의 다케시마다.

이때 한국산악회는 잡지사 사진기자로 활동하던 김한용(84) 씨를 동행시켰다. 한국산악회는 인부를 동원해 일본이 박은 말뚝을 뽑게 했는데, 김씨는 그 장면을 생생하게 렌즈에 담았다. 그리고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옆 바위에 세운 것이 한국산악회의 독도 영토 표석이다.

이 표석은 본래 1952년 8월15일 세우려 했던 것이기에 뒷면에 ‘15th Aug 1952’가 새겨져 있었다. 한국산악회는 영문 이름을 ‘Corea Alpine Club’으로 적어왔으나 영토 표석에는 ‘KOREA ALPINE ASSOCIATION’이라고 새겨넣었다. 한국을 대표해 영토 표석을 세우는 것인 만큼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Corea 대신 Korea를 사용했고, Club보다 대표성이 강한 Association을 새겼던 것. 그러나 나가라함은, 한국산악회 조사단을 태운 한국 해군의 905정이 독도를 떠나자 곧바로 대원들을 독도에 상륙시켜 한국산악회가 설치한 영토 표석을 철거해버렸다. 이듬해 봄이 되자 울릉도민 홍순칠 씨가 이끄는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 들어가 2년간 완벽하게 일본인의 상륙을 막아내고 독도 방어를 경북 경찰에 인계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 이후 한국은 일본인의 독도 상륙을 완벽히 막아냈기에 한국산악회 활동은 잊혀져갔다.

일본 시마네현이 고지를 통해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킨 지 꼭 100주년이 되는 2005년 일본 시마네현 의회는 2월22일을 ‘다케시마 날’로 선포해, 한-일 간에는 올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독도 영유권 분쟁이 일었다. 이때 기자는 독도 운동가로 활동해온 한송본(66) 씨의 제보로 김한용 선생을 만나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영토 표석을 세울 때 찍은 사진 일체를 제공받아 ‘주간동아’를 통해 공개했다. 이어 김학준 동아일보 당시 사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며느리인 조혜자 여사로부터 조재천 경북지사가 위령비를 세울 때 찍은 사진을 제공받아 2005년 3월20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보도케 했다.

경북도, 한심한 독도 역사 지우기

독도에 상륙한 한국산악회가 일본 측이 독도에 박아 넣은 일본의 영토 표시 말뚝을 없앴다는 사실을 보도한 1953년 10월18일자 아사히신문 기사와 한국산악회 조사단이 독도에 한국 영토 표석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사진과 함께 보도한 1953년 10월23일자 일본 아사히신문 기사.

이러한 사진이 발굴되자 일본 측의 ‘다케시마 날’ 제정에 분노하던 국민은 환호했다. 이 환호에 자극받은 경북도는 광복 60주년을 맞은 그해 8월15일 독도에서 두 비석을 복원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러나 3년 뒤인 최근 리앙쿠르 논쟁이 일자, ‘역사성을 망각한’ 경북도는 리앙쿠르라는 단어가 새겨진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이 자신들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이 표석을 덜컥 철거해버렸다.

더욱 한심한 것은 한국산악회의 행동이다. ‘주간동아’를 통해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 존재가 밝혀진 뒤 한국산악회는 조사단에 참여했던 생존자를 인터뷰해 조사단 명단을 밝혀내는 등 역사 복원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산악회 최홍건 회장과 이사회는 경북도가 다급하게 철거 요청을 하자 한국산악회의 영문 이름이 틀렸다는 이유 등으로 표석 철거에 동의했다. 좋든 싫든 역사는 역사로서 보존하고 복원해야 한다. 더구나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은 독도 지키기를 위해 우리 국민과 정부가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증거물인데, 두 기관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책임 추궁을 의식해 이 표석을 없애버렸다. 기념비를 비밀리에 철거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은 지금 독도 영유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반드시 철거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입장만 먼저 생각해 역사 파괴를 서슴지 않는 일부 인사들의 이기적인 사고다.


고발! 한국산악회 영토표석이 사라진독도 현장

경북도, 한심한 독도 역사 지우기
주간동아 651호가 발매된 직후 한 애독자가 한국산악회 영토표석이 사라진 독도 현장 사진을 보다 명확히 찍어와 주간동아에 제공했다.

보존해야 할 역사를 자의적으로 없애버린 경북도와 이에 쉽게 동의해버린 한국산악회의 단견을 고발하는 뜻에서 이 사진을 공개한다.




주간동아 2008.09.02 651호 (p12~15)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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