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6

2008.03.11

관계

  • 입력2008-03-05 14:5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관계

    -고정희


    관계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잔잔하지만, 어느새 폭풍처럼 휘젓는다. 아, 고정희의 시가 이토록 세련되며 아름다웠던가. 너무 아름다워 슬프다. 예전에 내가 보았던 사회비판적인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그의 시들은 목소리가 높고 거칠어 가슴에 와닿지 않았었다. ‘관계’를 처음 읽으며 나는 여러 번 시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와 시인에 대한 나의 섣부른 예단을 반성했다.

    싸리꽃, 둔덕, 막배, 토문강, 잔치를 끝내고 일렬횡대로 귀가하는 들쥐떼…. 섬세한 우리말에 실린 이미지들은 매우 토속적이며 동시에 현대적이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를 억제한 채 이미지의 전개를 통해 어긋난 관계를 풀어낸 시인의 재능에 감탄할밖에.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