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6

2008.03.11

故人들의 삶의 흔적은 아름다워!

영국 신문 부고 기사 역사의식 돋보여 … 유명인뿐 아니라 해외 인사에게도 지면 할애

  • 런던=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입력2008-03-05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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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인에게 과거는 현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평범한 영국인들이 갖는 역사의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영국인들의 이러한 역사의식이 돋보이는 곳 중의 하나가 신문의 부고란(Obituary)이다.

    영국 신문에서 부고란은 가장 인기를 누리는 고정지면 중 하나다. 이런 전통은 2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더 타임스’든, 창간 20년을 갓 넘긴 ‘인디펜던트’든 마찬가지다. 모든 영국 신문 편집자들은 죽은 사람을 위해 매일 최소한 2개면 이상을 할애한다. 물론 산 사람에 관한 기사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양이다. 하지만 국회의원이나 장관을 서너 번 지냈거나 TV 황금시간대를 주름잡던 연예인 정도에게나 원고지 서너 장 분량의 부고 기사를 선심 쓰듯 내주는 한국 신문과 비교하면 분명 파격적인 편집 방침이다.

    영국 신문이 부고 기사를 통해 소개하는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독자들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영국의 부고 기사는 생전 행세깨나 했던 유명 인사들의 장례 일시와 장소를 1단 기사로 전하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 예술가, 음악인 그리고 오늘날 영국의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 초석을 놓은 원로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의 삶을 회고하는 서사적 기사가 부고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국 신문의 부고란에는 영국인들만 초대받는 것도 아니다. 국제뉴스에 강한 영국 신문답게 부고란의 ‘고객’ 역시 지구촌 전체를 망라한다. 최근 발행된 영국의 일간신문들에서 몇 가지 예를 찾아보자. 2월25일자 ‘더 타임스’는 러시아 펑크록의 아버지로 불리는 팝스타 예고르 레토프의 삶을 회고하는 장문의 기사를 부고란 첫머리에 올렸다. 거의 한 면 전체를 차지하는 분량이다. 그런가 하면 이날자 ‘가디언’은 국내 인사들을 제쳐놓고 동유럽 슬로베니아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야네즈 드르노프세크의 사망 소식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또 2월15일자 ‘인디펜던트’는 도쿄에서 숨을 거둔 일본 영화감독 이치가와 곤의 사망 소식을 부고란 머리기사로 올리기도 했다. 영국 언론의 국제화 지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시민과 호흡을 함께했던 방송 진행자나 유명 언론인이 유명을 달리했을 때도 영국 신문은 각별한 관심을 드러낸다. 특히 공영방송 BBC는 자사의 원로 기자나 진행자가 사망하면 이를 주요 뉴스로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일 최소 2개 지면 … 신문 읽는 즐거움의 중요 이유

    부고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루는 영국 언론의 전통이 중앙 일간지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지방지는 지방지대로, 또 이보다 독자수가 훨씬 적은 지역 무가지들은 그들대로 자기 지역에서 활동했던 유명 인사들의 부고 기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가끔씩 90세가 넘어 눈을 감은 2차 대전 영웅들의 부고 기사를 읽는 것도 영국 신문을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영국 언론이 유명인의 사망 기사에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영국인의 기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흘러간 시대가 남겨놓은 삶의 흔적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영국인들의 큰 자랑거리다. 물론 영국의 젊은 세대에게 이런 사고방식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를 비난하기보다 현재를 만들어낸 초석으로 여기는 태도만큼은 영국인들이 세대를 막론하고 공통적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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