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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천국|리안 감독의 ‘색,계’

계산된 유혹, 욕망의 경계

  •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계산된 유혹, 욕망의 경계

계산된 유혹, 욕망의 경계
리안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기차가 나오지 않는 서부극 ‘브로크백 마운틴’을 만든 지 1년. 고전주의적 서부극에 동성애를 차용해 미국과 서부극에 관한 신화를 해체했던 그가 이번에는 몸이 교감하는 욕정의 세상, 그러나 악마와 싸워서 악마를 사랑하게 된 여자의 세계로 귀환한다. 기이하다. 1급 이야기꾼인 그가 어찌 이 뻔한 일제강점기의 닳고 닳은 스파이물에 도전하는가. 영화를 보고 깨달았다. 리안, 그가 이제 격정적인 에로스의 파도에 몸을 던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는 육체의 안무가 빚어내는 절절한 살과 살의 비등점을 더 높이고 싶어한다.

‘색, 계’는 리안의 영화임에도 스토리 전면에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가부장제로 얽어맨, 천형의 틀인 ‘가족’은 리안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중핵이었다. 심지어 스카이콩콩으로 애리조나 사막을 횡단하는 ‘헐크’조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가족 안에 존재하는 슈퍼히어로 아니던가.

그러나 ‘색, 계’에 이르면 리안 감독의 시선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다는 역사적 문제조차 그저 하나의 이야기 뼈대일 뿐이다. 왕치아즈가 막 부인으로 위장해 정보부 대장인 ‘이’(양조위 분)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감독의 시선은 한 여자와 한 남자 사이의 농밀한 감정의 공기, 부동의 자세 속에 미세하게 진동하는 심증 같은 것에 머무른다.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욕망의 물안개와 같은 것. 감독은 와인잔에 묻은 연지의 진한 색에서, 손목과 목 뒷덜미에 뿌리는 고급 향수의 내음에서 이와 치아즈의 서로에 대한 욕망의 화인(火印)을 슬쩍 흘린다.

일본군 정보부 대장에게 접근하는 미모의 스파이

리안 감독은 후기작으로 갈수록 어떤 금기의 그물망에 최면처럼 끌리는 듯 보인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두 카우보이가 알 수 없는 본능으로 달뜨는 것처럼 ‘색, 계’에서도 색과 계는 씨줄과 날줄처럼 맞물려 있다. 계, 즉 신중함과 경계는 이가 품고 있는 의심에서도, 치아즈를 감시하는 저항군의 눈길 속에서도 거미줄처럼 널려 있다(영화의 첫 장면은 일본군 감시견의 삼엄한 경계의 시선이다. 나중에 저항활동을 벌이는 학생 리더 광위민은 이에 대해 ‘일본군의 감시견’이라 칭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들킨다’는 말처럼 위험하면서도 치명적이고 고혹적인 단어가 어디 있겠는가. ‘들킨다’는 행위는 이와 치아즈가 서로에 대해 품은 마음을 들킨다는 것이요, 일본군에게 치아즈의 본색을 들키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이와 치아즈의 행각을 들킨다는 뜻이고 거꾸로 저항군에게 이의 동선을 들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들킨다는 말의 반대가 ‘숨김’이니, 영화에서 색은 ‘숨김’과 연관 있고 ‘들킴’은 계와 연관돼 영화 내내 긴장의 능선을 가파르게 올라간다. 이는 극장에 같이 가자고 유혹하는 치아즈에게 어두운 곳(즉 숨을 수 있는 곳)이 싫다고 한다.

감독의 변에서 리안 감독은 ‘색, 계’의 원작자 장아이링의 소설을 그대로 각색하기보다, 캐릭터와 연기가 서로 반응하듯 장아이링의 소설에 반응하려 했다고 밝혔다. 특히 ‘색, 계’ 속 연극무대는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은유이며, 연기는 치명적인 유혹이자 위장이다. 치아즈는 홍콩대학 시절 항일운동을 벌이지만, 그것은 경직된 이데올로기 일색의 유치한 선전물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막 부인을 연기하는 그녀는 점차 자신이 하는 역할에 매혹된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 남자와 그 남자를 죽이기 위해 껍질과 영혼까지 위장하며 유혹을 ‘드러내는’ 여자는 서로에 대한 욕망이 서로의 영혼 언저리까지 파고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리안은 이러한 모방 혹은 또 다른 자가 되고 싶어하는 열망이야말로 인간인 우리가 알 수 없는 경험에 자신을 내놓는 이유라고 적고 있다.

베테랑 양조위와 신예 탕웨이 호흡 ‘척척’

계산된 유혹, 욕망의 경계

‘와호장룡’ ‘헐크’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잘 알려진 리안 감독(맨 오른쪽)은 ‘색,계’를 통해 격정적인 에로스를 스크린에 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1시간 30분간 색과 계의 줄다리기가 팽팽한 무승부를 이루는 지점에 서 이와 치아즈는 서로에게 마음에 앞서 몸의 문을 연다. 치아즈는 홍콩에서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지만, 이가 상하이로 발령나는 바람에 살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3년 후 재회에서 이는 치아즈의 머리채를 잡아 벽에 내던진다. 이의 광포함 속에는 3년간 그가 경험했을 치아즈에 대한 강박과 그리움이 숨겨져 있다.

이 장면에서 양조위는 마찬가지로 금기의 사랑을 다뤘던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와는 다른 서늘한 내공을 발휘한다. 휘발되는 감정이 모두 한 점으로 농축돼 단단한 결기가 만져질 것 같다. 여자 주인공 탕웨이는 약동하는 욕망에 순응해 자신을 내던지는 열정의 빛이 눈부시다. 여대생 신분을 숨기고 점차 부유하고 세련된 유한마담 역할에 적응해가는 그는 고혹적인 자태로 스크린에 화마(火魔)를 남긴다. 한 사람은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베테랑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신예이건만 둘의 연기는 놀랄 만큼 잘 어우러진다.

‘색, 계’의 마지막, 그 모든 감춤과 탄로의 연극이 끝나고 치아즈가 떠난 빈 방에 남은 이는 치아즈와 함께했던 침대보의 여백을 쓰다듬는다. 그 역시 알고 있다. 일본이 패망하고 나면 자신의 짧았던 부귀와 탐욕도 곧 끝나리라는 것을. 이렇듯 은근한 행간의 여백을 벗삼아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깊이를 응시하는 리안 감독의 영화세상에서 주인공들은 늘 욕망의 경계에서 허무의 나락으로 귀결한다.

아카데미상을 거머쥔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리안은 ‘좋은 영화’뿐 아니라 ‘위대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색, 계’를 통해 그는 분노 갈망 유혹 희열 같은 진한 감정을 세밀화로 그려내는 솜씨를 발휘한다. 잊을 수는 있겠지만, 보지 않을 수 없는 영화. 그 찬연한 유혹의 ‘색’이 떠오른다.



주간동아 612호 (p82~84)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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