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1

2007.09.04

실크로드, 발상의 전환으로 바라보기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09-03 0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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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로드, 발상의 전환으로 바라보기

    중국 실크로드 트레킹.

    ‘실크로드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하시오.’

    2001년 서울대 구술문제다. 너무나 폭넓어 답변하기가 막막하다. 실크로드에 대한 배경지식만 늘어놓는다 해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제한된 시간 안에 보여줄 수 있는 창의력은 실크로드를 비판적으로 읽는 데서 싹튼다.

    우리에게 실크로드는 페르시아의 ‘천일야화’처럼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감추고 있어 신비롭다. 고비사막을 지나 ‘죽음의 사막’인 타클라마칸에 도달하면 쿤룬산맥, 톈산산맥이 사막을 남북으로 에워싸고, 사막이 끝날 즈음 파미르고원이 나타난다. 중국령 중앙아시아인 동투르키스탄, 즉 신장위구르자치구다. 이곳이 바로 한나라 적 장건의 서역(西域)이다. 그리고 파미르고원을 지나면 1991년 소련 해체와 동시에 독립한 5개 공화국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서투르키스탄이 나온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동서 교역로를 총칭하는 실크로드는 원래 서역이었다. 서역은 돌궐을 견제하기 위해 한무제가 대월지와 동맹을 맺으려 파견한 사신 장건(?~기원전 114)의 여행 이후 생긴 말이다. 반고의 ‘한서’에 따르면 서역은 한나라 서쪽에 있는 나라를 뜻했다. 한나라 때는 타림분지의 소륵(현 카슈가르), 화전(현 허톈), 우전(현 케리야), 신선, 언기 등의 작은 오아시스 부족국가들을 가리켰지만 당나라 때부터 인도와 서아시아까지 넓어진 것이다. 통일신라 적 혜초의 서역은 후자를 가리킨다.

    옛 서역(신장위구르)과 서투르키스탄을 합쳐 그곳을 처음으로 실크로드라고 부른 사람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다. 리히트호펜은 19세기 말 중국 각지를 여행하고 ‘중국’이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중국과 서투르키스탄, 인도와 서남아시아 등지에서 비단무역이 행해진 교역로를 ‘비단길’이라고 불렀다. 이후 서역에 대한 발굴과 탐험이 줄을 이으면서 중국 시안에서 시리아의 팔미라에 이르는 기다란 길을 ‘오아시스로(路)’라 부르고 북방 초원지대를 ‘초원로(스텝 루트)’, 지중해에서 중국 동남해안까지를 ‘해로’라고 부른다. 실크로드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길을 포함하는 길로 확장된 셈이다.



    그렇다면 실크로드를 통해 어떻게 비판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을까. 열쇠는 독서다. ‘실크로드와 한국문화’(소나무 펴냄)는 “현행 교과서 등에는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에 대한 기술이 극히 추상적으로 언급”돼 있고 “중국만이 문화적 주체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돼, 마치 중국이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 도자기, 종이, 화약 등을 다른 문화권에 일방적으로 시혜해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서양 중심 역사관은 기존 실크로드 연구에 그대로 투영돼 “서양의 문명과 문화가 동양사회로 소개되는 루트”가 바로 실크로드라는, 즉 ‘서양문화 전파론’ 견해가 우세하다고 한다. 실크로드가 동서문명의 ‘가교’라는 면만 부각되고 정작 그 가교 임무를 담당하던 문명교류의 무대이자 주인공인 중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인에 대한 연구는 뒤로 밀려나 있다는 지적이다.

    김영종의 ‘반주류(反主流) 실크로드사’(사계절 펴냄)도 실크로드 역사에서 정작 실크로드 사람들의 이야기는 빠져 있다는 발상 전환을 보여준다. 그래서 실크로드를 로마제국, 안식국(페르시아), 천축(인도), 한나라와 당나라 등 동서양의 거대 정주국가나 돌궐, 몽골제국과 같은 거대 유목국가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말 것을 먼저 주문한다. 실크로드의 주인공은 위에서 언급한 작은 오아시스 부족국가들의 현지주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그드 상인들은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유역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상업에 종사한 민족이다. 그들은 사통팔달의 지리적 이점을 갖고 실크로드의 동과 서를 중개한 ‘실크로드의 중개 무역국가’였다. 당나라 때 말인 호복(胡服)·호식(胡食)·호악(胡樂)·호선무(胡旋舞)·호희(胡姬) 등에 나오는 ‘호(胡)’자는 바로 소그드인을 가리킨다. 독립된 작은 도시국가 부하라, 사마르칸트, 판지켄트 등이 소그드 국가들이다.

    북쪽의 거대 유목제국과 남쪽 거대 정주제국의 충돌 사이에서 약소 오아시스 나라들이 만들어낸 약자(반주류)의 세계사가 진정한 실크로드사라는 것인데, 그들을 주인공으로 보는 까닭은 중앙아시아가 단지 문명교류의 경유지 구실만 한 게 아니라, 그것을 매개하고 흐름을 틀 지우는 독립변수였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도 오아시스 나라인 대하(大夏)의 흑장군과 일대일로 ‘맞장’뜨다 병사(病死)했다는 주장과 실크로드의 주역에 신라를 포함시킨 것도 창의적이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신라, 스키타이, 흉노의 금관에는 사람과 새의 문양을 볼 수 있다. 신라는 유목민처럼 황금을 숭배했는데 김알지의 ‘알지’가 황금을 뜻하는 투르크어 ‘알툰’ ‘알틴’을 연상시킨다. 신라 김씨 왕족의 묘역인 ‘대릉원’의 무덤 형식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인데 흉노의 무덤인 ‘쿠르간’과 비슷하다. 한나라 무제에게 항복한 흉노 왕자 일제가 김씨 성을 하사받은 뒤 한의 낙랑군 설치에 참여했는데, 낙랑군이 고구려에 멸망한 뒤에는 신라로 건너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렇다면 실크로드의 동단은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가 아닐까. 정수일 고려대 교수는 ‘실크로드학’(창비 펴냄)에서 ‘그렇다’고 단언한다. 우선 한반도의 옛 고대국가들은 중국과 유목국가, 동남아시아 고대국가들과 끊임없이 교류했다. 예컨대 전국시대 연(燕)나라 화폐 명도전(明刀錢)이 연나라 강역(疆域)뿐 아니라 고조선 영토인 한반도 북부에서도 다량 발굴된다. 백제 왕릉에서 동남아 특산 유리구슬이 나오고 아랍 문헌에서는 신라의 수출 품목들이 나온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고고학연구소에는 외국 사신단 행렬도가 있다. 상투머리에 모자 쓰고 새깃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헐렁한 바지에 끝이 뾰족한 신발을 신고 팔짱을 끼고 있는 이가 바로 수와 당을 견제하기 위해 서역의 돌궐제국에 간 고구려 사신이다. 발해 강역이던 연해주에서는 중앙아시아 상업민족으로 유명한 소그드인의 은화와 유물이 출토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은 서기 834년 다음과 같은 사치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목수건을 짤 때 비취모(캄보디아 비취새 털)를 사용할 수 없고, 머리빗과 모자에 슬슬전(타슈켄트 푸른 보석)을 금하며, 말안장에 자단과 침향(자바의 향기 나는 나무)을 사용하지 못하며, 수레의 깔개로 구수탑등(페르시아 양탄자)을 쓰지 못한다.”

    고려시대에도 서긍 이제현 등 많은 사신과 승려들이 중국과 실크로드를 오가며 문화교류를 했던 것이다. 조선 세종 때 채택한 역법은 이슬람력이었고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사자춤(북청사자놀이)은 오아시스 국가 쿠처의 산예에서 유래한다. 국악 ‘영산회상’의 원조는 인도 음악 ‘라가’다.

    이렇듯 한반도의 옛 국가들은 중국과 서역 유목제국, 동남아시아와 활발한 문화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정수일 교수의 ‘실크로드 비판적 읽기’는 성공한 셈이다. 오늘날에도 실크로드는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부산에서 유럽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남북철도가 상시 연결될 경우 ‘철의 실크로드’가 탄생해 우리나라에 어떤 사회경제적 효과를 가져다줄까.

    중국만이 문화적 주체성을 지니면서 동양문화를 전파했다는 ‘중국 중심 문화전파론’을 실크로드의 예로 비판해보자. 20세기 초 일본 탐험가 오타니 고즈이가 가져온 중앙아시아 유물 중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줘야 마땅한가. 논술은 이렇게 실크로드 하나를 쓰고, 말하더라도 발상 전환을 통한 비판적 사고력을 보여줘야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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