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0

2007.06.19

넣느냐 막느냐 ‘11m 희비 쌍곡선’

키커와 골키퍼 둘 다 엄청난 중압감 … 물리적 속도보다 심리적 지배력이 성패 좌우

  • 축구 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입력2007-06-13 17: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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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넣느냐 막느냐 ‘11m 희비 쌍곡선’

    페널티킥은 엄숙성과 비극적 미학을 품에 안고 있다.

    베컴, 바지오, 리켈메, 지코, 미야토비치 그리고 안정환. 이들의 공통점은? 수비수를 몰아붙이는 뛰어난 공격수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들은 페널티킥에서 실축한 스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페널티킥(승부차기 포함)은 차는 자와 막는 자, 둘 다 엄청난 중압감을 느낀다. 골키퍼의 반사능력보다 공의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구석으로 빠르게 차면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축구는 물리적 속도보다 심리적 지배력이 강한 세계다. 드리블이 100m 달리기가 아니듯 페널티킥 또한 물리적 속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찰 것이냐 하는 것은 물리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의 문제다.

    그래서 전후 독일 예술계의 반항아로 통했던 페터 한트케는 소설 ‘페널티킥을 맞이한 골키퍼의 불안’이라는 작품을 썼고, 그의 친구이자 장차 원작자보다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될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친구의 원작으로 장편영화를 만들어 오늘날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물론 이 영화는 축구 자체보다는 살인사건에 휘말린 골키퍼의 심리적 혼돈을 그린 작품이다.

    베컴, 바지오, 지코, 안정환 등 최고 공격수도 실축

    어쨌든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 페널티킥이다. 그 때문에 미국에서는 세계의 모든 것을 ‘미국화’해온 것처럼 한때 축구의 페널티킥을 아이스하키처럼 바꿔보았다. 아이스하키의 페널티샷처럼 중앙에서 키커가 공을 몰고 가고 골키퍼도 자유롭게 전진하면서 막도록 해본 것이다. 그리하여 어떻게 되었는가? 100년 가까이 축구의 엄숙성, 축구장의 비극적 미학, 키커와 골키퍼 그리고 6만여 명의 관중이 숨죽이며 벌이는 존엄한 제의가 재미있는 놀잇감으로 변해버렸다.



    페널티킥은 1891년 잉글랜드에서 시작됐다. 골을 막기 위해 반칙을 한 수비진이 골문 앞에 늘어서서 프리킥을 막는 폐단을 없애고, 공격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결정적인 찬스’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페널티킥이다. 그러나 베컴이 그랬고 안정환이 그랬듯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고국 폴란드와 소속팀 리버풀의 골문을 오랫동안 지킨 예지 두데크처럼 키커가 차려는 순간 전후좌우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홍보용 풍선인형처럼 온몸을 흔들어대는 등 골키퍼는 지난 100년 동안 이 운명의 힘에 맞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페널티킥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일도 있다. 1998년 K리그는 프랑스 월드컵 영향으로 엄청난 관중이 몰려들었다. 다섯 경기가 동시에 열린 8월22일은 하루 관중 ‘10만명 시대’를 돌파한 기념비적인 날인데, 이날 천안에서 열린 천안일화(현 성남일화)와 전남드래곤스의 경기는 연장전까지 갔으나 1대 1 무승부였다. 곧바로 승부차기를 했으나 5대 5. 그런데 날이 저물어 승부차기를 더 진행할 수 없게 됐다. 당시 오룡경기장은 야간조명 시설이 없었다. 고민 끝에 추첨을 하기로 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벤치만 지키며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으나 32개 출전국 선수 704명 중 미남 스타 11위에 뽑힌 장대일이 추첨에서 이겨 천안일화가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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