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0

2007.06.19

치열한 ‘셔틀콕 인생’ 문화충격 딛고 ‘하나로’

힘든 시절 보낸 역이민자들 강한 동질감 … 민간외교관 구실 톡톡 친목모임 급증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7-06-13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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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열한 ‘셔틀콕 인생’ 문화충격 딛고 ‘하나로’

    4월1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불협회 준비모임이 열렸다. 권인혁 전 주불대사, 박영혜 숙명여대 불문과 교수, 유정환 청주대 교수, 육군 소장 출신 차영구 박사(왼쪽에서 네 번째 부터).<br>5월22일 서울 강남 aT센터에서 한국·아르헨티나협회 창립식이 열렸다(사진 아래).

    “떠난 지 6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아르헨티나가 무척 그립습니다. 지구 정반대편에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곳이지만 저에게는 가까운 나라입니다. 정말 멋진 나라지요. 자원이 풍부하고 문화의 첨단을 걷는 나라입니다. 요즘도 겨울이 되면 그곳으로 피한(避寒)을 갑니다.”

    5월22일 저녁 서울 강남 aT센터에서 열린 한국·아르헨티나협회 창립모임에서 만난 고창옥(57) 씨는 아르헨티나에서 15년 살다가 2001년 영구 귀국한 역이민자. 2001년 아르헨티나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를 맞아 의류사업이 망해 귀국했지만 지금도 그곳에는 그의 부동산이 있고, 은행에 맡겨뒀던 돈도 묶여 있다. 인생의 4분의 1을 보낸 아르헨티나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다. 그는 지금도 그곳을 사랑하고, 아르헨티나에서 벗하며 살다 귀국한 사람들과도 자주 만나며 향수를 달랜다.

    역이민자가 늘어나면서 그들을 하나의 커뮤니티로 묶는 모임도 늘고 있다. 이 가운데는 ‘시사모’(시카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빠사모’(빠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뉴욕클럽’ 같은 친목 도모 수준의 모임이 있는가 하면, 한영협회 한독협회 한아협회 한불친선협회 등 양국간 교류협력에 도움을 주는 본격적인 모임도 있다. 다음 네이버 등 인터넷에서도 이런 모임이 활발하다.

    최근 5년간 1만6944명 영구 귀국

    한아협회는 2005년 만들어진 ‘아르헨티나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확대된 모임이다. 아르헨티나 대사 출신의 최양부 회장은 “역이민자, 상사 주재원, 전직 공관원, 유학생 출신으로 구성된 우리 모임은 친목 도모뿐 아니라 국내 민간기업이나 공공기관, 일반인에게 아르헨티나와 관련된 자문, 조사연구, 정보제공 등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아협회는 앞으로 연간 10여 회 세미나를 개최하고, 아르헨티나로 진출하려는 기업이나 사람들에게 현지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에 진출하려는 아르헨티나 사람과 기업들에도 한국 관련 정보를 제공할 계획이다.



    뉴욕클럽은 10년 전만 해도 압구정동에 같은 이름의 카페가 생기는 등 활발히 움직였던 모임이다. 회원 가운데는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 유종근 전 전북지사, 김혁규 전 경남지사 등 정치권 인사도 포진돼 있었지만, 지금은 결속력이 조금 약해졌다. 이에 뉴욕한인회장 출신인 이세종(46) 씨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살았던 교수들과 1.5세대, 사업가 등 300여 명이 8월 말 ‘뉴욕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할 계획이다. 뉴욕과 관련된 일을 할 때 서로 돕고, 뉴욕에서 한국을 방문해 사업을 하려는 이들에게도 도움을 주자는 차원이다.

    프랑스 출신 인사들의 모임은 한불친선협회 불문학회 파리동호회 등 10여 개에 이른다. 최근 이런 모임들을 통합하고 활발하게 하기 위해 권인혁 전 프랑스 대사, 차영구 전 국방부 대변인 등이 모여 6월20일로 예정된 한불협회 발족을 위한 예비모임을 가졌다. 권 전 대사는 대상 회원만 수천명에 이를 것으로 기대한다.

    최근 5년간 외교통상부에서 집계한 역이민자(영구 귀국)는 모두 1만6944명. 같은 기간 이민자(현지거주자 중 이주 신고자 제외)가 모두 4만3900명이었으니 5명이 나가고 2명이 들어온 셈이다. 역이민자는 2002년 이후 조금씩 줄어들다 2006년 다시 438명이 늘어나 3238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참고용’일 뿐이다. 요즘은 외국 영주권을 포기하지 않거나 국내에 주민등록을 하지 않고 양쪽을 오가며 사는 다중국가 생활자가 많아졌다. 인하대 이진영 교수(국제정치학)는 ‘역이민’이라는 말이 구태의연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사회에 국제화 촉진 기여

    “지금은 세계화 시대니까 이중국적을 넘어 다중국적자, 다중국가 거주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역이민자들이라기보다는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합니다. 이주 양상이 점점 더 다양화되고 있지요. 자신은 남고 가족만 해외로 보내는 기러기 아빠, 이민했다 자신만 귀국하고 가족은 현지에 남는 뻐꾸기 아빠,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사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형태의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고, 다양한 정보를 국내에 갖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들끼리의 모임이 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인생의 한창때를 함께 고생하며 지낸 사람들간의 동질성은 무엇보다도 강하다.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 시절이 그리워져 그 나라를 바라보며 서로를 의지하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즉, 그들은 ‘즐거운 지옥’ 서울과 ‘심심한 천국’ 이민국을 오가며 사는 사람들이다.

    둘째, 국내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귀국하면 이민 초기의 생활 못지않게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된다.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사회에서 10년, 20년 벗어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따라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사업을 할 때 직원을 뽑고 관리하는 일에서부터 사업자금 규모, 돈에 대한 감각 등이 떨어진 이들이 많습니다. 1000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직원 월급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사회 내부의 은밀한 코드를 발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아요. 사기를 당하는 이들도 많지요.”(영구 귀국자 최모 씨)

    이들 모임의 활성화는 한국사회에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한아협회 창립식에 보낸 메시지에서 이런 차원의 의미를 짚어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외교관계를 수립한 지 45년이 지났지만 양국간 교류는 미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양국관계를 더 강화하기 위해서는 정부간 협력채널도 중요하지만 민간 교류협력도 활성화돼야 한다. 정치 경제 문화 학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부와 민간을 연결해주는 민관협력 메커니즘도 필요하다.”

    김제완 ‘세계로신문’ 대표는 민간 차원의 다중국가 생활자들의 모임이 활발해져야 우리나라의 국제화가 촉진된다고 강조했다.

    “세계화 시대에 한국사회는 상대적으로 국제감각이 처져 있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3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북쪽은 북한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물론 인터넷과 전화로 실시간 대화할 수 있고, 정보가 빛의 속도로 교환되고 있지만 국민의식은 외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요. 예컨대 ‘뉴욕타임스’나 ‘르몽드’의 경우 대부분 국제뉴스가 1면 톱을 장식하지만 한국 신문은 국내 뉴스를 상대적으로 많이 부각하는 점도 아직은 한국사회가 덜 국제화됐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이런 때 역이민자나 다중국가 생활자들의 국제감각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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