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5

2007.05.15

‘감탄’이 배불러야 행복하죠

  • 김정운 명지대 대학원 여가경영학과 교수·문화심리학

    입력2007-05-09 2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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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탄’이 배불러야 행복하죠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씩 웃는다’고 했다. 그래선 안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반인 대상 강연에서 가끔 물어본다. 왜들 사시느냐고. 그럼 다들 정말 조용히 웃는다. 가끔은 누가 그런다. 죽지 못해서 산다고. 그럼 나는 지금 당장 앞으로 나오시라고 한다. 바로 죽여드리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사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재미없는 이유는 왜 사는지 몰라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려고 산다. 불행해지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럼 또 묻게 된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이냐고. 행복을 느끼는 구체적인 경우는 각자 다르겠지만, 행복할 때 반드시 나타나는 신체반응이 있다. 감탄이다. 감탄이 동반되면 그 순간 행복하다.

    우리가 열심히 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가는 이유는 그곳의 유적이나 문화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을 보고 감탄하기 위해서다. 여름휴가 때 밀리는 고속도로를 뚫고 바다로 향하는 이유도 단지 바다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다가 보이면 모두들 한결같이 ‘와’ 하고 감탄한다. 즉 감탄하기 위해 바다로 가는 것이다.

    식욕, 성욕은 동물에게도 있다. 인간의 욕구만은 아니다. 즉 생존과 종족번식을 위한 동물적 욕구일 따름이다. 인간의 욕구는 ‘감탄의 욕구’다. 인간문명은 이 ‘감탄의 욕구’ 때문에 생긴 것이다. 먹고사는 일과 관계없는 그림을 왜 그리고, 노래를 왜 부르기 시작했을까. 감탄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감탄의 욕구를 바탕으로 한다. 동물은 새로운 것을 보면 두려워한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감탄한다. 그래서 동물과는 다른 진화과정을 걷게 된 것이다.

    독일이 통일된 뒤 동독인들이 가장 먼저 구입한 물건은 자동차였다. 그 전까지 동독에는 트라비(트라반트의 줄임말)라는 한 종류의 자동차만 있었다. 1957년부터 생산된 트라비는 동독 사회주의의 자랑이었다. 플라스틱으로 차체를 제작하고, 2기통 엔진으로 연료 효율성을 극대화한 ‘최첨단’ 자동차였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인간은 감동 느껴야 사는 재미가 쏠쏠

    동독 공산당은 더 이상의 자동차 개발은 필요 없다고 했다. 더 폼나게 차 모양을 바꾸는 일은 인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단정지었다. 속도도 시속 80km면 충분하다면서 더 빠른 것은 자본주의의 허영이라 했다. 그 사이 서독은 더 사치스럽고 빠른 자동차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결국 동구 사회주의는 망했다. 감탄의 욕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념교육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탄의 욕구는 성욕만큼이나 근본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삶의 감탄이 적을수록 사람들은 상품구매를 통해 감탄의 욕구를 채우려 한다. 후기 자본주의는 이 빈틈을 기가 막히게 파고든다. 그러나 감탄의 자본주의적 구매행동에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어김없이 적용된다. 갈수록 더 비싸고 가치 있는 상품을 구입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삶의 감탄에는 ‘한계효용 증가의 법칙’이 적용된다. 어느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아주 세밀한 차이에도 감탄,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마니아적 삶이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나 경제가 아니다. 아무도 감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척박한 문화는 감탄을 빼앗아가고, 감탄의 부재는 다시 적개심에 가득 찬 문화를 만들어낸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감탄이 없는 사회는 더 이상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니다. 감탄이 사라지면 더는 인간이 아니다.

    지난 3일간 감탄한 적이 있는가. 그럼 사람답게 산 것이다. 감탄한 기억이 없다면, 미안하지만 먹고는 살았지만 사람으로 산 게 아니다. 그래서 사는 게 힘들수록 음악회도 가야 하고 미술관도 가야 한다. 훌쩍 혼자 떠나기도 해야 한다. 그럼 감탄이 돌아오고, 사는 목적이 다시 분명해진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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