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5

2007.05.15

체코 영화의 전설 ‘이리 멘젤 감독’

신산한 삶과 비극 웃음과 풍자로 요리

  • 입력2007-05-09 1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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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코 영화의 전설 ‘이리 멘젤 감독’
    4월26일부터 9일간 열리는 제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은 이는 체코 영화의 전설 이리 멘젤(69) 감독이다. 그는 28세 때 만든 데뷔작 ‘가까이서 본 기차’(1966년)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일약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실상 체코 영화의 존재를 세계에 처음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전주국제영화제서 대표작 세 편 상영

    그의 두 번째 영화 ‘줄 위의 종달새’(1968년)는 체코의 둡체크 공산당 서기장을 선두로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던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 운동을 시도하다 소련군에 의해 좌절됐던 ‘프라하의 봄’ 당시 제작됐다가 상영 금지됐다. 이 작품은 무려 22년 뒤인 1990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돼 최우수작품상인 황금곰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는데 지난해에는 ‘나는 영국왕을 섬겼다’로 베를린 영화제에 참가해 국제평론가상을 받았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가까이서 본 기차’ ‘줄 위의 종달새’ ‘거지의 오페라’ 세 편이 상영됐다. 영화제가 끝난 뒤에는 서울 시네큐브에서 5월10일부터 한 달간 세 편의 영화가 차례로 개봉된다.

    ‘가까이서 본 기차’는 독일에 점령당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체코를 무대로 한다. 희비극(comedy-tragedy)이라는 장르를 가장 매력적으로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은 감독의 데뷔작답게 영화는 비극적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체코의 국민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22세 청년 밀로시 흐르마의 이야기다. 밀로시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야기가 내레이션과 함께 전개되는 시작부터 감독의 재치가 돋보인다. 밀로시는 철도원 수습생이 돼 시골 작은 역에서 일하게 된다. 할 일은 별로 없고 시간은 남아도는 철도원 수습생. 그 역에는 늘 비둘기 모이 주는 데 열중하는 역장과 여자들을 유혹하는 재주가 뛰어난 역무원이 있다.

    아직 총각인 밀로시의 관심은, 사랑하는 마샤 앞에만 서면 주눅 드는 그의 ‘남성’을 강하게 일으키는 것이다. 한심하고 게으르며 성에 대한 관심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역무원들은 그러나 한편으론 폭탄을 가득 실은 독일군 기차를 파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 미묘한 정치적 비판이 깔리면서도 외설적인 농담으로 유쾌하게 전개되는 영화는 뜻밖의 비극적 장면으로 이야기를 마감한다.

    멘젤 감독은 “영화가 왜 해피엔딩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관객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 밀로시의 고민을 이해하고 그가 겪은 삶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멘젤 영화의 특징은 심각한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는 점이다. 그의 영화는 직설적이지 않다. 풍자적이고 우회적이며 풍부한 상징과 유머를 동반한다. 전주에서 만난 멘젤 감독 역시 그의 영화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가까이서 본 기차’의 상영이 끝난 뒤 마련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관객들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그를 찍으려 하자 정면으로 다시 측면으로 서서 포즈를 취했다.

    “한국 관객들은 내 영화를 보며 곧바로 웃음으로 반응한다. 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그 유머러스한 영화의 표현을 함께 즐길 줄 안다.”

    체코 영화의 전설 ‘이리 멘젤 감독’

    ‘줄 위의 종달새’, ‘가까이서 본 기차’, ‘거지의 오페라’ (사진 위부터)

    부정과 비리에 대한 날카로운 메시지

    그의 두 번째 영화 ‘줄 위의 종달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인간적인 공산정권을 풍자적으로 조롱하고 있다. ‘가까이서 본 기차’보다 현실은 훨씬 어둡게 그려져 있지만 그 속에서도 빛나는 유머는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인간의 육체는 감옥에 가둘 수 있어도 정신은 가둘 수 없다는 메시지를 탁월한 미학적 표현과 함께 전달한다.

    산업사회의 온갖 폐기물 속에서 부르주아 사회에 물든 정치범들이 수용된 수용소가 있다. 그들은 정신개조를 위해 매일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 정치범들 가운데는 철학교수, 색소폰 연주자, 요리사 등 다양한 사람이 있다. 그중 요리사 청년은 같은 지역에서 일하는 한 여죄수와 사랑에 빠진다.

    멘젤의 영화는 어두운 현실에서도 웃음과 따뜻한 휴머니즘을 잃지 않는다. 그의 영화가 폭넓은 지지를 받는 것은 직설적이고 설교적이지 않으면서도 부정과 비리에 대해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줄 위의 종달새’ 역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순적 사회를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멘젤의 영화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상황에 놓였지만 매우 희극적인 행동을 한다. 무성영화 시절 찰리 채플린이 주던 웃음을 떠올리게 한다. 슬랩스틱 코미디가 전하는 웃음이 아니라,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 희비극적 요소가 그의 영화에서 탁월하게 표현된다.

    “나에게 채플린은 학교와도 같은 존재다. 요즘 영화들은 지나치게 말장난이 많다. 영화는 말이 아니라 보이는 장면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거지의 오페라’는 동구권 대몰락 이후의 체코를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인간의 자유와 본성을 억압하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으니 이제 그의 영화도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본의 침투로 타락하고 변질돼가는 체코의 현대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는 ‘거지의 오페라’는 부하들을 부려먹기로 유명한 갱단 두목 매키스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는 수많은 여자를 농락하는 호색한이기도 하다. 그런데 거지들에게 소매치기를 시켜 부를 쌓은 거지 두목 피첨의 딸을 유혹하면서 이야기가 꼬이기 시작한다.

    영화처럼 삶을 보는 따뜻한 시선 간직

    ‘거지의 오페라’ 원작은 1728년 영국의 극작가 존 게이가 오페라 대본으로 쓴 것이다. 그 후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버전으로 각색됐는데, 1929년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원작의 인물과 상황을 새롭게 해석해 ‘서푼짜리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러나 멘젤의 영화 ‘거지의 오페라’는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이며 유명한 희곡작가였던 하벨이 다시 쓴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하벨은 동구권 몰락 당시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섰으며 그 뒤 체코 대통령이 됐다.

    이리 멘젤의 아버지는 체코에서 유명한 저널리스트이며 작가인 요셉 멘젤이다. 멘젤은 1957년부터 5년간 체코의 필름아카데미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그는 배우와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했는데 특히 자신의 작품에 자주 단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가까이서 본 기차’에서 의사로 출연했는데 관객들이 그가 나오는 장면을 알아보지 못하자 “지금은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예전엔 꽤 봐줄 만했다”고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소개했다.

    체코 영화를 세계에 알린 이리 멘젤 감독은 고희를 앞둔 나이지만 건강하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대화를 할 때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고 그의 영화처럼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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