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6

2007.03.13

“비보호좌회전을 許하라!”

서울市政硏, 도로 신호체계 개편 주장 “교통 흐름, 보행시간 연장, 대기오염 개선 효과”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7-03-07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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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보호좌회전을 許하라!”

    주차장과 다름없는 강남 학동역 네거리.

    - 장면 1

    2월28일 오전 8시께 서울 강남구 역삼초등학교 앞 왕복 2차선 교차로. 출근길 ‘러시아워’라 그런지 차량 흐름이 답답하다. 녹색 불이 들어와도 밀려 있던 차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지 못한다. 차량이 더 많아지는 오후가 되면 이곳은 거의 ‘주차장’으로 변한다. 서울 서초동에 사무실이 있어 평소 이 일대를 자주 지나다니는 정지석(47) 변호사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제 서울에서 운전 속도를 높이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차량이 흐름을 타고 꾸준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특히 좌회전이 허용되지 않고 돌아가야 할 때가 많습니다. 시간과 연료 낭비가 적지 않습니다.”

    - 장면 2

    영국인 앤드루 헤이우드(36) 씨는 서울에서 처음 운전을 했을 때 영국과 다른 교통체계 때문에 당혹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영국의 운전 방향이 서울과 반대라는 점과는 별도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녹색 불이 들어오면 직진뿐 아니라 비보호좌회전(영국의 우회전)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신호를 받아야만 좌회전을 할 수 있어 혼란스러웠습니다.”

    서울은 국제도시를 표방하고 있지만 교통신호 체계는 폐쇄적이다. 무엇보다 신호등의 의미가 다르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는 녹색 신호등의 의미가 직진, 좌회전, 우회전 등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교통운영에 관한 유엔 협약인 빈협약에 따라서다. 그러나 한국에선 일부 시행하고 있는 비보호좌회전을 제외하고는 녹색 신호등이 켜질 때 좌회전을 금지하고 있다.

    서울시 자동차 등록대수만 280만 대, 인천 경기를 포함하면 733만 대에 이른다. 차량들이 뒤엉켜 어디나 막히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시내 평균 주행속도는 27.4km. 자전거 주행속도보다 나을 게 없다. 이런 교통 흐름을 일시에 개선하는 묘책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뜻밖에도 문제의 핵심은 ‘좌회전 처리’에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하 시정연) 이광훈 도시교통부 선임연구위원은 서울 런던 뉴욕 워싱턴D.C. 도쿄 파리 등 세계 대도시 교통신호 운영체계를 비교한 뒤 “좌회전 신호 운영 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꿀 경우 눈에 띄는 개선 효과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세계적 추세에 따라 녹색 불일 때 좌회전이 가능한 ‘비보호좌회전 체계’로 바꾸자는 것이다. 신호체계를 바꿀 경우 초기의 혼란을 막기 위해 주도로인 간선도로 등에서는 좌회전 신호를 그대로 유지하되 2, 3차로 이하 도로에서만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호대기 시간 감소 및 소통 원활 △횡단보도 보행 시간 연장 △정체와 공회전으로 인한 연료낭비 방지 및 대기오염 개선 등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비보호좌회전을 許하라!”

    교차로의 소통이 원활하도록 노면에 진입구간을 마련해놓은 도쿄 시내.

    신호대기 시간 감소 및 소통 원활

    서울시 도로에는 좌회전 전용 신호를 두는 교차로가 전체의 80%로 1642개에 이른다. 외국은 극단적으로 적어 10~20%대. 나머지 신호는 좌회전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 비보호좌회전으로 허용한다. 서울의 비보호좌회전 비율은 18.9%(2005년 기준).

    문제는 좌회전 신호가 생기면 신호 사이클이 길어진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간선도로의 평균 신호교체 수(현시)는 3.2회다. 즉, 교차로에서 신호가 3.2회 바뀌어야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2, 3차로의 보조간선도로도 평균 3.1회로, 주도로와 큰 차이가 없다. 이렇게 신호주기가 길어지는 만큼 정체도 늘어난다.

    신호 대기 시간은 서울 간선도로의 경우 140~160초, 비간선도로는 110~130초에 이른다. 도쿄 런던 파리 등 세계 대도시 간선도로의 경우 120초 내외, 비간선도로는 70~80초다. 전 세계 대도시 가운데 서울처럼 신호 대기 시간이 긴 곳이 없다.

    신호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운전자들은 당연히 조급해진다. 이번 신호에 나가지 못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신호가 끊겨도 기를 쓰고 빠져나가려 한다. 좌회전하려는 차들은 좌회전이 금지되는 교차로에만 몰려 더 긴 좌회전 신호가 필요하게 된다. 실제로 서울시 간선도로의 좌회전 신호 길이는 25~30초로 직진 신호의 50% 수준을 넘고,비간선도로의 좌회전 신호 역시 평균 28초에 이른다.

    만약 좌회전 신호를 빼고, 녹색 불일 때 비보호좌회전이 가능하도록 해서 적녹 신호만으로 운영한다면 신호 대기 시간이 80~90초로 줄어든다. 시정연이 도봉구 쌍문교차로에서 모의실험을 한 결과 비보호좌회전을 도입할 경우 지체도가 53%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남구 도곡동사무소 앞 네거리도 지체도가 43~47% 줄어들었다.

    횡단보도 보행 시간 연장 및 대기오염 개선

    “비보호좌회전을 許하라!”
    비보호좌회전 도입으로 차량 소통이 원활해지는 것은 물론, 보행자들도 느긋하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게 된다. 보행자들이 횡단보도를 뛰듯이 걸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보행신호가 짧기 때문이다. 즉 별도의 좌회전 신호를 부여하기 때문에 신호교체 횟수가 늘어나고, 그만큼 신호주기가 길어져 보행신호에 많은 시간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전용 좌회전이 있는 교차로의 신호주기가 120초라면 교차로 횡단보행에 줄 수 있는 시간은 30초이며, 대기시간은 90초가 된다. 그런데 비보호좌회전이 가능해지면 신호주기(적녹 2회)와 대기시간이 각각 80초, 40초로 줄어들고 보행시간은 40초로 늘어난다.

    “비보호좌회전을 許하라!”
    실제로 서울 도로의 횡단 보행시간은 세계 대도시 가운데 가장 짧다. 더욱이 런던이나 파리 등에서는 적색 신호일 때도 보행자의 판단에 따라 횡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횡단보도 가운데 ‘보행자 보호용 섬’을 둬 미처 횡단하지 못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신호체계를 갖고 있으니 보행자들이 신호 위반하는 걸 밥 먹듯이 하지요. 그만큼 사고 위험성도 큽니다. 걸음이 늦은 노약자들의 경우 중간에 신호가 바뀌어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요. 횡단보도에서는 무엇보다 운전자의 양보가 중요한데, 보행자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운전자들도 얼마나 많습니까.”(이광훈 연구위원)

    비보호좌회전은 대기오염 개선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시정연 김운수 도시환경부 연구위원은 “비보호좌회전을 늘리면 그만큼 차량 흐름이 순조로워지고 공회전이 줄어들어 자동차가 내뿜는 오염물질이 최대 6%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의 대기오염원 가운데 자동차가 70%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효과다.

    관계당국 간 입장 차이가 시행 걸림돌

    이처럼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비보호좌회전 확대 적용이 과연 제대로 시행될 수 있을까. 이 제도가 도입되면 먼저 좌회전 차량과 직진 차량의 사고, 좌회전 차량과 보행자의 사고가 많아질 수 있다. 실제로 도쿄에선 우회전(한국의 비보호좌회전) 차량과 보행자 간의 사고가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연구위원은 “파리, 런던처럼 횡단보도를 직선이 아니라 굴곡이 있는 형태(변형 S자)로 만들어 좌회전 차량이 교차로를 벗어나 진입해 있게 하거나, 사고가 났을 때 쌍방과실로 처리하는 방법 등을 도입하면 사고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관계당국 간 입장 차이도 비보호좌회전 시행에 걸림돌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비보호좌회전 확대 도입은 시정연에서 연구 차원에서 시행한 것이라 전면적인 도입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시범적으로 몇 구간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규제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 역시 사고 위험성 때문에 도입에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다.

    시민단체나 일반인들은 신중론을 편다. 민만기 녹색교통운동 사무처장은 “소통을 개선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모든 구간에 일률적으로 적용돼선 안 된다. 비보호좌회전을 위해 신호를 기다린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택시기사 이완주(55) 씨는 “전체적으로 흐름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양보할 줄 모르는 운전자들 때문에 제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시정연의 강만수 전 원장도 “비보호좌회전 도입은 여론이 무르익어 대통령후보가 선거공약으로 채택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의외로 제도 시행 자체의 합리성보다는 교통문화, 운전자들의 시민의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선진국일수록 교통법규에 의한 규제보다는 질서의식, 양보와 배려의 문화에 기대고 있다. 비보호좌회전 확대 도입은 그런 곳에서나 가능하다”는 한 경찰관의 말은 지금 서울의 교통문화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욕을 하게 된다는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것이 교통신호 체계인가, 아니면 시민들의 본성인가.

    최악의 교통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보호좌회전 확대 도입이라는 충격요법은 일종의 필요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전문가는 “버스중앙차로제 도입 초기 못지않은 혼란이 예상되지만, 소통 개선의 효과가 분명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무조건 도입을 미루는 것도 현명하지 못한 태도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시정연은 비보호좌회전 확대 도입과 관련, 3월에 공청회를 갖고 종합보고서를 펴낼 예정이다.

    외국의 비보호좌회전은

    신호규제 최소화 운전자 시민의식에 기대


    “비보호좌회전을 許하라!”

    교차로의 소통이 원활하도록 노면에 진입구간을 마련해놓은 도쿄 시내.

    런던 뉴욕 도쿄 파리 등 세계 대도시와 서울은 교통신호 체계에 대한 접근법에서 큰 차이가 난다. 서울을 제외한 타 도시는 규제를 최소화하고 운전자들의 시민의식에 크게 기대고 있다. 간선도로의 경우 소통 위주로 신호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 이하 보통 도로에서는 운전자들 간의 양보를 바탕으로 신호를 운영하고 있다.

    런던의 경우 간선도로의 주요 교차로나 사고위험이 있는 교차로에 한해 우회전(국내의 좌회전) 전용 신호를 주고 있다. 그 밖의 도로는 별도의 좌회전 신호 없이 비보호좌회전을 기본으로 운영한다.파리는 교차로에 로터리형 교통섬(round point)을 도입하고 있고, 신호등은 기본적으로 적녹 2회 교체 신호를 사용하고 있다. 교통섬 안에서는 좌회전뿐 아니라 우회전, ‘U턴’까지 자유롭다. 신호등 4회 교체주기는 중요 교차로나 사고위험이 높은 곳에서만 사용한다. 차도보다 더 넓은 보도, 보행자의 눈높이에 맞춰 설치된 각종 신호체계 등 보행자 안전을 중시한다. 차량이 없을 때는 적신호에도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다.

    도쿄는 최근 주요 외곽도로와 방사선 교차로에 전용 좌회전 신호를 도입했다. 그러나 신호시간은 10초 이내로 짧다. 그 외 대부분 비보호좌회전을 기본으로 하고 신호주기도 100초 이내로 짧다. 좌회전할 때 교차로 안 노면에 진입구간(extended-left-turn bay)을 그려두고 회전차량이 대기할 수 있게 해놓고 있어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

    워싱턴D.C와 뉴욕 역시 녹색 불일 때 기본적으로 좌회전을 허용하고 있다. 좌회전 금지가 필요한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시간대를 관리한다. 전용 좌회전의 경우 10초 정도 부여하고, 신호주기는 100초로 운영한다. 뉴욕은 일방통행제를 적극 도입해 신호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보행자가 있을 경우 우회전할 수 없는 것도 특이하다. 비보호좌회전을 ‘허용(permissive) 좌회전’이라고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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