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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게릴라의 개성만점 배낭여행 (21) 불가리아 소피아

작고 아담한 도시, 가을 닮은 거리

  • 글·사진=김형렬 www.travelbay.co.kr

작고 아담한 도시, 가을 닮은 거리

작고 아담한 도시, 가을 닮은 거리

비에 젖은 소피아 시내.

불가리아는 지난 밤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10월 초순의 새벽. 전날 저녁 9시 터키 이스탄불을 출발해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로 달리는 나이트 버스는 두 나라의 국경 검문소에서 멈췄다. 앞자리에 앉은 백인 숙녀가 “Passport control”이라고 알려줬다. 우리 일행은 모두 버스에서 내려 국경 검문소 앞에 줄을 섰다.

일행은 버스기사를 포함해 열 명 남짓이었다. 그저 관행적인 검사인 줄 알았는데 젊은 공무원이 내 여권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기다려라”라고 짤막하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나이 든 한 사내가 와서 내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 또한 내 여권을 가지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동안 숱하게 국경을 넘었지만 별 설명 없이 이렇게 다짜고짜 세워놓는 푸대접은 처음 받아본다.

작고 아담한 도시, 가을 닮은 거리

노점에서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는 레닌 두상. 불가리아는 1989년 공산주의 정권이 몰락한 뒤 자유화의 길을 걷고 있다.

꼭두새벽 비 내리는 이국 땅에서 길 위의 국경초소 앞에 홀로 서 있으려니 오만 잡생각이 다 든다. 버스기사가 “노 프라블럼”이라며 내게 말을 건네왔지만 답답한 심정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다시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 나와 내 여권을 툭 건넸다. “땡큐!” 한마디와 함께.

터키와 불가리아. 땅 위에 줄 하나 그었을 뿐인데도 이쪽과 저쪽은 완전히 딴판이다. 이스탄불에서 국경까지는 새로 닦은 듯한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려왔다. 그러나 국경에서 소피아까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차선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고 도로 옆으로는 주택과 상가, 작은 시골 마을들이 연이어 스쳐 지나갔다.

새벽 6시. 소피아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터미널은 지방 도시로, 이웃 나라로 오가는 사람들로 한창 붐볐다.



공산주의 과거와 자본주의 오늘 교차 묘한 분위기

작고 아담한 도시, 가을 닮은 거리

알렉산더 네브스키 교회.

모닝커피 한 잔으로 몸을 데운 후 숙소를 찾아 나섰다. 론니플래닛의 동유럽 편은 소피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낭여행자 숙소로 ‘아트 호스텔(Art Hostel)’을 꼽는다. 서울로 치면 종로 뒷골목쯤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무엇보다 숙소 분위기가 좋다고 한다. 터미널에서 만난 불가리아 신사의 도움으로 그의 자동차를 타고 숙소까지 갈 수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벤츠. 한국에서도 타보기 힘든 고급 자가용이다. 먼 나라에서 온 여행자이기에 누릴 수 있는 사치(?)다.

아트 호스텔은 젊은 남녀 3인방이 운영하는, 낭만이 물씬 풍기는 호스텔이다. 건물 일부를 임대받은 숙소의 시설은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수 없지만 숙소 곳곳에는 이런저런 예술적 흔적이 남아 있다. 거실, 룸, 바깥벽 등에는 아방가르드풍 그림과 낙서들이, 객실로 가는 길의 안뜰에는 꽃·잡목과 함께 파티를 했음직한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호스텔에서 준 식권으로 근처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우산을 받쳐들고 소피아 시내로 걸어나갔다.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이제 우산을 받쳐들지 않으면 흠뻑 젖을 정도다. 호스텔에서 준 지도는 비에 젖어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가이드북을 펼쳐 들고 이 길 저 길 사이로, 짧은 시간 안에 소피아의 냄새를 흠뻑 맡을 요량으로 걸음을 바삐 떼었다.

소피아. 이토록 예쁜 도시 이름이 또 있을까? 지적이고 아리따운 백인 여인 같은 이름이다. 소피아의 실제 모습도 그러할까? 소피아의 거리는 다른 유럽 도시들의 그것과 엇비슷하다. 그러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정리가 덜 된 것 같고, 작은 듯 아담하고 조금은 어둡다. 게다가 비까지 내린다.

작고 아담한 도시, 가을 닮은 거리

유아세례를 받고 있는 가족.

소피아의 대표적 명소인 알렉산더 네브스키 교회(Ploshad Alek-sander Nevski)를 찾았다. 아트 호스텔에서 쉬엄쉬엄 길을 따라 걸으니 약 20분이 걸린다. 가는 길에 만난 슬라베이코프 광장(Pl. Slaveikov)과 교회 입구에는 중고서적과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이 즐비했다. 가게들은 과거 공산정권 시대의 유물을 팔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과거와 오늘이 교묘하게 교차된 느낌이다. 특히 레닌의 두상을 발견했을 때는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교회의 금색 돔은 제법 거대한 규모였다. 런던, 파리, 로마 등에서 본 으리으리한 성당들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딱 소피아가 포용할 수 있는 크기랄까. 성당 안은 어두웠다. 촛불들이 실내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성모마리아 상은 서유럽의 성모와는 달리 좀더 동양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교회 한쪽에서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의 영세 의식이 열리고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근엄한 신부 앞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몸을 조아리고 있었다. 19세기에 전사한 20만 군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에서 열린 새 생명의 영세는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교회를 나와 소피아 중심가로 발길을 옮겼다. 소피아의 볼거리들은 이 교회에서 금색의 천사상인 소피아 동상이 있는 곳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소피아 동상 앞의 비토샤 대로는 명품 쇼핑가와 바, 나이트, 성인클럽 등이 모여 있는 불가리아 최고의 중심가다. 당연히 소피아의 나이트라이프도 이 거리에서 시작한다. 가을을 닮은 불가리아처럼 거리의 네온사인과 흘러나오는 재즈, 블루스 음악들도 가을을 닮은 듯하다. 거리를 활보하는 소피아의 청춘 남녀들도 유행에 민감하기는 세계 여느 나라 젊은이들과 마찬가지였다. 미국식 청바지를 입거나 유명 메이커의 운동화, 구두를 신고 화려하고도 다양한 색깔의 헤어스타일을 가진 젊은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시내를 걷다 보면 소피아는 볼거리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장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서도 다른 유럽 도시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 과거 공산 시절과 새롭게 밀려든 자본주의의 공존과 대조를 천천히 음미하며 하루 이틀 쉬어가기에는 좋은 도시다. 무엇보다 도착하자마자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던 불가리아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 씀씀이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주간동아 2007.01.09 568호 (p82~83)

글·사진=김형렬 www.travelb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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