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8

2007.01.09

‘꺾어지는 해’ 北 핵폭탄급 중대 결심 하나

김정일 65회 생일 등 5, 10년 단위 행사 집중 … 실리 위해 핵사찰·남북정상회담 카드 꺼낼 수도

  • 하태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taewon_ha@donga.com

    입력2007-01-03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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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0월9일 핵실험을 강행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북한은 2006년 ‘여명(黎明)’이라는 단어를 유달리 많이 사용했다. 사전에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이라는 의미로 풀이된 여명은 핵실험 한 달 전인 9월8일 ‘노동신문’ 정론(논설)이 “동무들, 이제는 고생 끝에 낙을 보게 되었소. 우리에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단 말이오”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주목받았다. 당시 이 단어는 7월5일 미사일 발사에 이어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이른바 ‘강성대국’ 건설의 기틀을 열었음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됐다.

    김 국방위원장을 최고사령관으로 한 선군(先軍) 10년을 통해 자칭 강성대국으로 거듭난 북한은 2007년 6개의 주요 행사가 이른바 ‘꺾어지는 해’를 맞이한다. 북한이 꺾어지는 해를 중시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중요한 국가적 기념일일 경우 5년, 10년 단위로 ‘꺾어’ 평소보다 성대하게 치르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경제난 타개 ‘발등의 불’

    그중에서도 ‘민족 최대의 명절’로 일컬어지는 김 국방위원장의 65회 생일(2월16일)과 고(故) 김일성 주석의 95회 생일(태양절·4월15일)이 2007년에 있다. 또한 ‘선군정치’의 기치 아래 북한에서 가장 중시되는 ‘조선인민군’의 창설도 75주년(4월25일)을 맞게 된다. 그뿐 아니라 김 위원장의 ‘공화국 원수’ 추대와 김일성 주석의 ‘공화국 대원수’ 추대가 각각 15년이 되며, 김 위원장의 ‘당 총비서’ 추대도 10주년을 맞는다.

    이처럼 중요한 해를 맞아 김 위원장이 뭔가 중대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하는 관측이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는 북한이 핵보유국의 지위만으로는 헐벗는 인민을 먹여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선군(先軍)에서 실리’로 정책 전환을 하지 않을 경우 김정일 정권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일종의 ‘촉구성’ 전망일 수 있다. 또한 북한이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나 2000년 북-미 공동코뮈니케에 합의했을 때처럼 또다시 실기(失期)해 유엔 차원의 대북제재가 본격화할 경우 북한체제의 위기지수가 상승해 내부폭발(implosion)하는 등 급변사태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이 이 같은 국제사회의 우려를 고려한다면 먼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과 남북관계 교착을 타개할 단안을 내릴 수 있다는 관측이 가능하다. 북한에 가장 시급한 현안인 안보문제와 경제문제에서 가시적 성과를 얻고자 하는 김 위원장이 미국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금융제재 해제의 대가로 평안북도 영변의 5MW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고, 이어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수용하는 것을 상정해볼 수 있다.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 이후 유럽연합(EU)과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섰던 선례에 비춰볼 때, 핵 보유의 여세를 몰아 적극적인 개혁 개방에 나서는 등 주민들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 국력을 집중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2006년 10월 핵실험 직후 “앞으로는 경제사업에 큰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지며, 10월 말 6자회담 재개를 결심한 뒤에는 경제 분야 현장을 집중적으로 시찰했다.

    이와 관련, 2007년 1월1일 발표될 북한의 신년공동사설 내용이 주목받고 있다. 신년공동사설은 북한이 한 해 동안 어떤 분야에 집중할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짐작케 하는 척도가 된다. 정부 당국자는 “그동안 선군정치를 주창하며 핵 개발과 군사력 확충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왔지만 이제는 스스로 핵보유국이 됐다고 선언한 만큼, 식량난과 에너지난 해결을 통해 경제건설에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후계구도를 가시화해 체제의 공고화를 꾀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 북한 내부에서는 최근 김일성 부자의 10대 시절 영웅담을 적극 선전하는 한편, 김 위원장만을 지칭하던 ‘혁명의 수뇌부’를 후계자에게까지 확장해 표현하는 등 사전 정지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문제조사연구소의 이기동 남북관계연구센터장은 “교육 분야를 담당하던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 선전선동 담당으로 다시 옮겨갈 것이라는 소문이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며 “김 비서를 비롯한 엘리트의 이동은 후계구도 정립을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05년 8월 북한대표단을 이끌고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참배했던 김기남 비서는 김정일 위원장으로의 후계구도 확립에 관여했으며,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유훈(遺訓) 통치’라는 슬로건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2차 핵실험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남북관계의 복원 가능성도 제기된다. 통일연구원 전현준 선임연구위원은 “경제난 해결의 실질적 지원자가 남측이라는 것을 잘 아는 북한이 ‘민족공조’를 명분으로 2007년 초부터 적극적인 대남 공세를 펼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2006년 7월 미사일 발사 이후 ‘미사일 발사문제 해결을 위한 출구가 마련되고 6자회담이 재개될 때까지’ 쌀과 비료 지원을 중단한다고 했던 정부가 어떤 명분으로 남북관계 재개에 나서느냐는 것.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10월에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결국 식량과 비료 지원이 절실하다고 판단한다면 북한이 어떤 식으로든 고리를 만들려고 할 가능성이 있고, 관례대로라면 이산가족상봉 등 인도적 사안에 대한 합의 대가로 남측이 쌀이나 비료의 지원 재개를 약속하는 형식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각에서는 2007년 대선에서 극적 반전을 노리는 여권(與圈)과 북한의 이해가 맞아 떨어질 경우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현실성은 낮아 보인다. 1차 정상회담을 위해 남측이 4억5000만 달러의 ‘면담료’를 김 위원장에게 지불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2차 정상회담에서는 북측이 그보다 많은 대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지만 임기 말의 노무현 정부가 그런 무리수를 두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2007년 북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 관측도 만만치 않다. 2001년 출범한 조지 W 부시 정부의 미국에 대항해 6년을 버텨온 북한이 남은 임기 2년을 그럭저럭 지낸 뒤 차기 행정부와 담판을 지으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2006년 12월18~22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13개월 만에 재개된 6자회담은 “금융제재 해결 없이는 핵동결 논의를 할 수 없다”는 북한의 완강한 주장 탓에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차기 회담 개최 시기와 관련해서도 ‘가장 빠른 기회에(at the earliest opportunity)’라고만 명시해 회담이 언제 열릴지 불명확하며, 회담이 열린다 해도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요구할 태세여서 전망도 어두워 보인다. 일각에서는 회담 무용론까지 나오는 상황이므로, 북한이 ‘꺾어지는 해’를 맞았다고 미국의 압력에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오히려 2차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노동당 창건 60주년이자 선군정치 10년, 민족적으로는 광복 60주년을 맞았던 2005년, 북한은 2월10일 핵 보유를 선언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5년 전인 2002년에도 김 위원장 부자가 60회와 90회 생일을 맞았지만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이용한 핵개발에 나서며 2차 북핵 위기를 촉발했다.

    북한이 어떤 선택을 하든 2007년은 북핵문제 해결을 포함한 한반도의 위기관리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07년 김 위원장의 선택이 주목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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