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1

2005.11.22

忠 위해 목숨 건 고려 말 삼형제

야은 뇌은 경은, 학문과 의기 모두 우열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출중

  • 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입력2005-11-21 08: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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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 위해 목숨 건 고려 말 삼형제

    구산사 마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전씨 3은의 후손들.

    공교롭게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대변인, 전병헌 씨와 전여옥 씨가 담양 전씨로 같은 문중 사람이다. 조선시대에는 문중이 곧 당파로 연결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세상이니 별스럽게 여길 필요는 없겠다. 담양 전씨는 조선시대에 이렇다 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는 조선 성리학의 마침표를 찍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있다.

    전우는 조선이 망하자, 서해 먼바다 왕등도로 몸을 숨겼다. 공자가 ‘논어’에서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道不行乘浮于於海)”고 한 말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는 집안 선조의 유사한 판단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유배 중 죽고 무인도로 잠적

    고려가 망하자 서해 절해고도로 몸을 숨긴 충신이 있었다.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뇌은(隱) 전귀생(田貴生)이다. 전우는 뇌은의 친형인 야은(隱) 전녹생(田綠生)의 후손이어서, 뇌은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 야은 전녹생, 뇌은 전귀생,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이 삼형제를 여말 3은(麗末三隱·목은, 포은, 야은)에 견주어 전씨 3은이라고 부르는데, 전우는 전씨 3은을 기리는 유허비문을 1899년에 짓기도 했다.

    담양 전씨가 조선시대에 큰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데는 고려 말 전씨 3은의 여파가 크다. 전씨 3은이 모두 목숨을 걸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던 충신들이라 그 후손들이 조선 왕조와 잘 융화하지 못했다.



    전씨 3은은 고려 말에 은(隱)자 돌림의 호를 썼던 10은(隱)에 꼽힐 만큼, 삼형제가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따져보면 전씨 3은처럼, 삼형제가 함께 충신의 소리를 듣는 예도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다.

    맏형 야은 전녹생(1318~1375)은 조선시대 서당의 주요 교재로 사용된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처음으로 들여온 인물이다. 1366년에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들여왔는데,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합포(지금 마산)에서 근무할 때 간행소를 차려 책을 펴냈다. 야은은 이인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선대왕(先代王) 때부터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나라를 멀리하기로 했는데, 이를 어기려 드니 이인임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이인임의 위세에 눌려 야은은 옥에 갇히게 됐고, 옥관(獄官)을 맡은 최영(崔瑩) 장군에게 심하게 매질을 당한 뒤에 유배됐다가 장독이 올라 죽고 말았다. 이때 함께 상소했던 반남(潘南) 박상충(朴尙衷)도 장독으로 죽고,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도 유배를 당했다.

    忠 위해 목숨 건 고려 말 삼형제

    전씨 3은을 모신 홍성 구산사(좌). 전씨 3은을 함께 모셔 제사를 지내는 모습.

    막내 경은 전조생은 정몽주에 견줄 만큼 도학(道學)에 밝았다. 그는 “학문의 요(要)는 호기심을 좇아 한없이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거두어 두는 것이니, 마음을 거두어 두는 공부는 하나도 경(敬)이요, 둘도 경(敬)이다”로 시작되는 글인 ‘경학문(警學文)’을 남겼다. 그는 충숙왕 복위 5년(1336)에 문과에 급제했고,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왕으로부터 “두 왕자를 부탁하니 경은 오늘 밤 짐의 말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청을 듣고 조복(朝服)이 모두 젖을 정도로 울었다고 한다. 그는 왕명을 받들어 충혜왕의 큰아들 충목왕(1337~48, 여덟 살에 즉위해 열두 살에 승하)을 따랐고, 둘째 아들 충정왕(1337~52, 열두 살에 즉위해 열네 살에 강화도로 축출)을 끝까지 보필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하지만 강화도로 들어간 이듬해(1353년)에 충정왕이 독살당하면서 그의 행적 또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숨어서 밭을 갈았다 하여 경은(耕隱)이라는 호를 얻었다는데, 삼형제 중에서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큰형과 함께 죽은 박상충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고, 정몽주 또한 그의 초상화를 보고 “때를 잘못 만나고 보니/ 그 어진 덕이 한껏 쓰이질 못했구나/ 덕은 있으나 수를 얻지 못했으니/ 알 수 없는 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안자의 나이에 비교해볼진대/ 육 년을 더 보태셨도다/ 농사꾼으로 숨어 있었지만/ 전왕을 잊어본 적이 없도다”라고 찬했다. 공자의 제자 안자가 서른두 살에 죽었으니, 경은은 서른여덟 살에 세상을 버린 셈이다.

    둘째 뇌은 전귀생이 두문동에 은거

    忠 위해 목숨 건 고려 말 삼형제

    담양 향교 앞에 세워진 삼은전선생유허비.

    조선이 태동하기 전에 경은의 자취가 지워졌음에도, 경은은 그의 형 전귀생과 더불어 두문동 72현으로 꼽힌다. 삼형제 중에서 둘째인 뇌은 전귀생은 두문동에 은거했던 인물이다. 두문동에서 나와 예성강의 벽란진을 건널 때 채귀하(蔡貴河)와 박담(朴湛)과 주고받은 시가 전해온다. “마침내 나라가 망했는데 숨은들 무슨 소용이리/ 북문을 나와 서쪽 멀리 바다 섬을 찾아가네.”

    뇌은이 숨어든 서해의 섬이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군산 앞바다 어청도와 보령 앞바다 외연도에 전횡(田橫) 장군의 사당이 있는데, 혹자는 어청도의 전횡 사당에 뇌은의 시가 걸린 적이 있어서 어청도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추정은 제나라(기원전 391~기원전 221년)가 망하자 제나라 장수 전횡이 병사 500명을 이끌고 서해의 섬에 정착했다는 전설과 담양 전씨가 제나라의 후예라는 전설이 중첩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제나라 장수인 전횡이나 제나라 후예인 담양 전씨의 전귀생, 전우가 모두 나라가 망하자 서해의 섬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문중의 전통처럼 보인다.

    전씨 3은, 삼형제가 살던 고향집은 전남의 담양 향교 자리다. 큰형인 야은이 집터를 담양부에 제공해 향교를 짓게 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치 집을 절에 희사하듯, 성리학에 집을 헌정한 격이다. 지난 세기에 담양 향교 유림과 전씨 후손들은 이를 기려 ‘三隱田先生遺墟碑(삼은전선생유허비)’를 담양 향교 앞에 세웠다. 현재 모든 담양 전씨는 전씨 3은의 후손들인데, 충청도 홍성과 경상도 울진에 많이 모여 살아 각기 구산사(龜山祠)와 경문사(景文祠)를 세워 해마다 음력 10월1일에 3은 선생을 기리고 있다.

    제사가 치러지는 홍성 구산사를 찾아갔더니, 여러 대화 속에 “도학을 향한, 나라를 향한 3은 선생의 정신이 곧 담양 전씨의 정신”이라는 소리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담양 전씨 대종회 02-2297-29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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