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6

2005.08.02

‘세계 최고’의료보장 수술받나

캐나다 최고재판소 ‘민영시스템’ 인정 판결 … 대부분 현 제도 만족 국민들은 침묵

  • 밴쿠버=황용복/ 통신원 facebok@hotmail.com

    입력2005-07-28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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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고’의료보장 수술받나

    진료대기 기간이 긴 것이 캐나다 의료보장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의료보장제도가 가장 잘 갖춰진 나라라고 말한다. 의료체계가 전면 공영제여서 온 국민이 각 주정부가 시행하는 공공 의료보험에 자동 가입되고, 진료비는 본인의 부담금 없이 의료보험에서 전액 지불된다. 동시에 캐나다는 세계에서 의료체계에 가장 문제가 많은 나라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사립 종합병원 설립이 불가능해 국민은 선택의 여지 없이 공영제 틀 안에서만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의료 서비스 공급의 한계 때문에 환자는 긴 진료대기 기간을 감내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 돈을 내고 ‘용한’ 의사를 찾아갈 기회마저 없다.

    해결책은 간단해 보인다. 의료 분야에 시장 원리를 도입하거나, 아니면 공영제의 틀을 유지화되 민영시스템(사립병원, 상업적 의료보험 등)을 허용해 국민들에게 선택하게 하면 된다. 그러나 명쾌해 보이는 이 해법은 가장 경솔한 대안이 될 수도 있어 지난 수십 년간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지만 역대 정부는 공영제 원칙을 고수해오고 있다.

    퀘벡 이어 다른 주에서도 준비

    그런데 6월 캐나다 최고재판소가 공영제 원칙이 무너질지 모를 중대한 판결을 내렸다. 퀘벡 주의 민영시스템 도입 옹호론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민간이 운영하는 상업적 의료보험을 금지한 ‘퀘벡 주 법은 주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캐나다의 모든 국민(캐나다 국적자는 물론이고 합법적으로 장기체류하는 모든 사람)은 각 주정부가 운영하는 공공 의료보험에 자동으로(보기에 따라 강제로) 가입된다. 치과 진료만 예외이고 이들이 이 나라에서 받는 ‘의학적으로 필요한(medically necessary)’ 모든 서비스는 본인 부담금 없이 전액 보험으로 충당된다. 감기 치료에서부터 장기이식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원칙이 적용된다.



    소득이 낮은 사람에게는 보험료가 전액 또는 부분 감면된다. 또 납부자가 보험료를 내지 않더라도 보험의 효력은 유지되고, 다만 미납액만큼 주정부에 빚을 질 따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료보험료는 일반 세금과 비슷한 성격이다. ‘만인균등’이 이 나라 의료보험의 근본 취지인 것이다.

    캐나다 가정의는 자유롭게 개업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의 단계에서부터는 공영제에 편입된다. 이 나라 종합병원들은 모두 공립이고, 개업한 전문의는 환자를 수술하는 등 적극적 치료를 해야 할 때 자신의 병원이 아닌 공립 종합병원으로 환자와 함께 가서 그 시설의 장비 및 지원 인력 등을 활용한다. 가정의든 전문의든 진료비는 전액 의료보험에 청구한다. 이때 치료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개업의는 스스로 고가의 장비와 시설을 갖출 엄두를 못 낸다. 현재 캐나다에 전문의 수준의 치료를 하는 사설 클리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의학적으로 꼭 필수적이지 않은, 예컨대 성형수술이나 시력교정수술 등은 오래전부터 합법의 영역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에서 CT(컴퓨터단층촬영), MRI(자기공명영상법) 등 고가의 진단 장비와 수술 시설을 갖추고 ‘의학적으로 필요한’ 시술까지 환자에게 돈을 받고 해주는 사설 클리닉들이 생겨났다. ‘진료비’를 받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이들 클리닉은 ‘시설이용료’를 받는다. 이런 클리닉들을 강제로 폐쇄해야 하느냐로 그동안 논란이 많았다. 이번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클리닉들을 두둔한 셈이다.

    진료대기 기간이 긴 것이 캐나다 의료체계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데 대해서는 현행 제도의 옹호론자들도 이견이 없다.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몇 주일씩 기다리기 일쑤고, 수술 등의 본격적 처치가 이뤄지기까지 몇 달 혹은 1년 이상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현행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사회주의적 의료 배급제’의 병폐라며 ‘환자가 기다리다가 길에 쓰러져 죽는 나라가 캐나다’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캐나다의 의료보장제도는 의료 분야에도 시장 원리를 적용한 미국의 제도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미국은 65세 이상의 노인에게 연방정부가 의료비를 지원해주는 메디케어(Medicare), 저소득층의 의료보장을 위해 주정부들이 시행하는 메디케이드(Medicaid)가 공공 의료보장의 골격이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 대다수 국민은 의료보장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전액 자기 돈으로 진료를 받거나 상업적 의료보험에 들어 그 부담을 완화한다.

    노인과 저소득층에게 정부가 의료 서비스를 도와주고,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일반인은 스스로의 책임으로 질병에 대처하라는 이 원칙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대단히 큰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사립 의료기관들의 진료비가 엄청나게 비싸고, 이에 따라 상업적 의료보험의 보험료도 매우 높다. 2002년 기준으로 캘리포니아에서 4인 가족의 의료비 전액을 부담해주는 상업적 의료보험의 보험료가 연간 7400달러(약 777만원)였다.

    유럽식 2원체제 개선 목소리도

    이 때문에 미국인 중 많은 사람이 공공 의료보장 대상도 아니고 상업적 보험에도 들지 않은 의료 무보장 지대에 방치돼 있다. 90년대의 경우 그 비율이 전 국민의 14%였고, 그 이후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근로조건이 좋은 직장은 종업원의 의료보험료를 전부 또는 일부를 보조해주지만, 이런 혜택이 전혀 없는 직장이 더 많다. 제너럴모터스(GM)나 포드 등 굴지의 미국 대기업들이 요즘 경영난에 빠진 이유 중 큰 몫으로 거론하는 것이 바로 등골이 휘는 종업원들에 대한 의료보험료 부담이다.

    2001년 4월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 일어난 한 사건은 미국 의료보험의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한 남자(당시 57세)가 우체국에 나타나 창구직원에게 ‘나는 강도이니 돈을 모두 내놓으라’는 쪽지를 건넨 뒤 현관에서 기다리다가 경찰관에게 붙잡혀 갔다. 그는 이 사건 직전 암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할 수 없자 감옥에 가서 나랏돈으로 치료받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미국은 캐나다에 비해 의료기술 수준이 더 높거나 최소한 비슷할 뿐 아니라, 미국 국민은 캐나다 국민보다 의료 서비스 선택의 폭이 더 넓다. 또 국내총생산 중 의료비 지출 비율에서 미국이 캐나다보다 높다. 그럼에도 미국인보다 캐나다인의 평균수명이 더 길다. 2000년 UN 발표 기준으로 캐나다인의 평균수명은 79.1세로 세계 최상위 그룹에 들었고 미국은 76.8세였다.

    캐나다의 주요 여론조사 기관의 하나인 이코스리서치가 2000년 선진 8개 나라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자기 나라의 의료제도에 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만족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캐나다(58%)였고 네덜란드·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스웨덴·영국 순에 이어 꼴찌가 미국(10%)이었다.

    이처럼 캐나다인들 중에 현행 제도에 대해 긍지를 느끼는 사람이 많지만, 의료제도에 관한 공론의 장이 펼쳐지면 미국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럽식 2원체제로 가야 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공공보험과 민간보험을 같이 운영하는 2원체제가 유럽의 선진국들에서도 운용되고 있지만 역대 캐나다 정부가 꿈쩍도 하지 않는 이유는 캐나다가 유럽과 달리 미국과 등을 맞댄 채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는다는 지정학적 우려가 깔려 있다. 약간의 방향 전환이 공공제의 전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미 캐나다에서 많은 ‘캐나다적인 것’들이 미국의 영향으로 사라졌고 또 사라지고 있지만, 캐나다 국민 중 침묵의 다수는 질병과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의료보장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번 최고재판소 판결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판결은 최고재판소 판사 7명 중 4명이 찬성하고, 3명이 반대한 상태에서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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