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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소설 ‘쇼퍼홀릭’에 비친 쇼핑형 인간의 심리학 … 만족은 잠시, 안 사면 우울, 사도 사도 “사고파”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소비시대를 사는 젊은 쇼퍼홀릭에게 구매는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왼쪽). 미국의 현대 미술 작가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계산을 마치고, 매장 직원이 물건을 담아 건네는, 반짝거리는 쇼핑백의 짙은 녹색끈을 쥘 때, 난 거의 소리 내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너무 멋지다. 바로 이 순간 말이다. 나의 손가락에 빛나는 쇼핑백의 손잡이가 걸리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멋지고 새로운 상품이 나의 것이 되는 그 순간. 어디에 비유하면 좋을까. 며칠 굶다가 버터 바른 따뜻한 빵을 한입 가득 베어 문 순간이랄까. 아침에 눈을 뜨니 주말이었을 때 같다고 할까. 섹스의 황홀한 순간! 마음속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이건 순수하며, 매우 이기적인 쾌락이다.’

쇼핑의 심리를 이처럼 노골적으로 털어놓은 쇼핑중독자는 없었다. 쇼핑중독자들은 범죄 사실을 진술하듯 쇼핑 행각과 구매 리스트를 털어놓아야 했다. 그러나 소설 ‘쇼퍼홀릭’의 주인공 레베카 블룸우드(베키)는 카드 빚에 허덕이고, 은행 직원에게 쫓기면서도 쇼핑의 쾌락에 빠져든다. 그리고 당당하게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전 세계의 쇼핑중독자들을 사로잡은 이유다.

‘쇼퍼홀릭’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

레베카라는 25세의 경제전문지 기자의 쇼핑 편력을 다룬 소설 ‘쇼퍼홀릭’이 최근 트렌드세터들 사이에서 최고의 화제가 되고 있다.

영국에서 2000년에 처음 나온 ‘쇼퍼홀릭’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다빈치 코드’ 열풍이 분 지난해와 올해에도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 10위권을 지키고 있다. ‘쇼퍼홀릭’으로 단숨에 인기 작가가 된 저자 소피 킨셀라는 속편에 해당하는 ‘쇼핑중독자, 맨하탄에 가다’ ‘쇼핑중독자, 결혼하다’ ‘쇼핑중독자 자매’ 등을 잇달아 펴냈다.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쇼퍼홀릭’ 연작은 우리나라의 패션 관계자들과 유학파 멋쟁이들 사이에서도 ‘머스트 해브 베스트셀러’(패션지에서 이번 시즌에 유행이 예상되므로 꼭 구입하기를 추천하는 상품을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라 한다)로 알려졌다.

“친분이 있는 방송 PD가 꼭 읽어보라고 해서 교보문고 외서 코너에 갔어요. 책을 찾을 필요도 없더군요. 눈에 띄게 차려입은 어떤 여성이 ‘쇼퍼홀릭’을 보고 있었고, 제게 1권을 찾아주기도 했어요. 초면이었지만 ‘아, 당신도?’ 하는 공감이 오고 갔어요.”(패션에디터)

입소문이 퍼져 ‘쇼퍼홀릭’은 번역도 되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온·오프라인 서점을 통해 ‘원서’로 2만부가 팔려나갔다. 그리고 7월 초 번역된 ‘쇼퍼홀릭 1편-레베카, 쇼핑의 유혹에 빠지다’(황금부엉이 펴냄)가 나오자마자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에 곧바로 진입했다.

인터넷 ‘쇼퍼홀릭’ 공식 블로그에는 ‘꼭 내 이야기 같다’는 반응과 ‘앞뒤 안 가리고 쇼핑하는 레베카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반응이 반씩 섞여 있다. 어느 쪽이든 무절제와 ‘충동조절 이상’ 등을 이유로 비난받던 쇼핑중독자들의 삶을 유쾌하게 그렸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원서로 2만부가 팔려나간 ‘쇼퍼홀릭’. 번역본도 곧바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쇼퍼홀릭’의 등장인물들은 쇼핑을 즐기거나, 중독돼 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남자든 여자든 쇼핑을 즐긴다. 게다가 캐릭터를 규정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물건이고, 소비하는 브랜드다. 모임에는 ‘파이낸셜 타임지’를 옆구리에 끼고 가야 상사를 씹어도 진지해 보인다.

그러나 소설 밖, 쇼핑중독자들의 현실은 결코 즐거울 리 없다.

다국적기업에 근무하는 윤모(33) 씨는 중산층 가정의 외동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과 세련된 감각을 가진 완벽한 모습의 싱글이지만, 이제는 절제가 불가능해진 쇼핑 욕구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어린 시절, 매우 엄했던 윤 씨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분에 넘치는 돈을 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윤 씨는 그 돈으로 학용품이나 인형을 혼자 사는 습관을 들였다. 고등학교 때 외국으로 유학 간 윤 씨는 외로움 속에서 거의 매일 전화를 해 ‘돌아가겠다’며 울었고, 그럴 때마다 부모는 수백 달러씩을 보내주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직장을 얻었지만 윤 씨는 여전히 쇼핑을 계속했고, 카드를 막기 위해 5000만원의 빚을 졌다. 한두 번 아버지 몰래 빚을 갚아주던 어머니도 완전히 손을 들었다고 한다.

“‘쇼퍼홀릭’의 베키를 보고 어쩌면 이렇게 나랑 똑같을까, 생각했어요. 나도 레베카처럼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산 뒤에 로또 생각도 해보고, 명품 수입 같은 부업을 해보려 했거든요. 월급이 적진 않지만, 시계나 보석처럼 점점 더 비싼 물건을 사게 되니까 늘 돈이 부족하죠. 거의 매일 점심시간에 쇼핑을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일처리가 미뤄지니까 회사에서 엄청 눈치를 주는데도 이튿날 점심시간이 되면 또 나가게 돼요. 데이트보다 쇼핑이 더 즐겁고 백화점에서 쇼핑하다 보면 시간 개념도 사라져요.”

중독자들 빚에 시달리다 병원 신세

윤 씨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이른 쇼핑중독자들도 적지 않다. 주부 김모 씨는 산후 우울증이 쇼핑중독으로 이어진 경우다. 결혼 후 바로 출산을 한 김 씨는 달라진 자신의 몸매와 육아에 대한 부담, 남편의 무관심 때문에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다 김 씨는 우연히 아기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가서 쇼핑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화려한 매장과 친절한 직원들의 태도에 우쭐해진 김 씨는 계속 필요도 없는 비싼 아기용품을 사들였고, 백화점 매장에서 외상을 줄 정도의 고객이 됐다. 집에 오면 김 씨는 극심한 후회 속에 쇼핑한 물건을 감추곤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또다시 쇼핑을 하러 갔다. 이렇게 해서 카드 빚이 3000만원을 넘어서자 김 씨는 극도의 우울증 속에서 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됐다.

김 씨를 치료한 서울 강북삼성병원 신영철 교수는 “쇼핑중독 자체보다는 다른 문제 때문에 병원을 찾는데, 쇼핑중독자들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왜 나를 피곤하게 하는가’의 저자인 서울대병원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쇼핑중독이 충동조절 장애 때문이고, 강박증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극과 극에 있지만, 행동의 절제가 안 된다는 점에서 통한다고 설명한다. 권 교수는 “남편이 출근하면 백화점 문도 열기 전에 뛰어가는 주부를 치료한 적이 있는데, 상담을 하다 보니 그녀의 초등학생 아이는 이를 계속해서 닦는 강박증을 갖고 있었다. 환경과 유전적 요인 모두 관계가 있어 보였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엘튼 존, 재클린 오나시스, 이멜다 같은 유명 인사들의 쇼핑중독은 대개 강박증에 기인한다”고 한다.

또 미국에서는 앤더슨컨설팅(현 액센추어)의 잘나가던 여자 이사가 쇼핑중독에 빠져 공금을 횡령한 사건에서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하다’며 무죄 선고를 내린 사건이 큰 사회적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쇼퍼홀릭’의 베키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중독 증세를 보인다. 쇼핑할 때 그 물건이 ‘필요하다’거나 ‘투자’(요리 도구나 맞선용 정장 등)라는 식의 합리화를 한다. 세일 때 사는 것은 돈 버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용인정신병원 전문의 하지현 씨는 “쇼핑중독자들은 욕망과 규제 사이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합리화’ 기제를 작동시킨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지름신’이 내렸다고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키와 그 추종자들은 전형적인 의미의 ‘쇼핑중독자’들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삶의 공허에서 비롯한 우울증 때문에 쇼핑하는 ‘40대의 전업 주부’ 쇼핑중독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20대 싱글이며, 물건을 사는 행위도 즐기지만, 브랜드나 상품이 가진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더 큰 즐거움을 얻는다. 물건을 마구 사기는커녕 패션지와 인터넷 등의 정보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찍어두고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등 물건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전통적 쇼핑중독자들처럼 물건을 산 뒤 마음에 들지 않아 쌓아둔 채, 또 사러 나가는 자폐적 태도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질지가 최대의 관심사이며 감각과 노력을 보여주는 멋진 쇼핑 아이템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한다.

베키가 흉측하게 생긴 나무 그릇을 보며 저런 걸 누가 사겠느냐고 생각했다가 점원이 ‘엘르 데코’에 나왔던 물건이라며 잡지 찢은 걸 보여주자 곧바로 ‘백색의 미니멀한 공간’에 잘 어울릴 만한 물건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자신의 안목을 칭찬하며 친구들이 얼마나 놀랄지 상상하고 사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신영철 교수는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물건이 아니라 구매 행위에 쾌감을 느끼는 쇼핑중독자들과, 브랜드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상품의 이미지에 탐닉하는 브랜드마니아들은 다르다. 물론 브랜드마니아들도 현대 사회가 만든 우울한 단면이긴 하다”고 구분한다.

이미지 탐닉하는 브랜드마니아도 한 부류

그런 점에서 신용카드를 아버지로, 쇼핑센터를 어머니로 둔 젊은 베키들은 여성 미디어 작가 바바라 크루거가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 이 명제에 가장 근접한 새로운 인류다.

베키에게 쇼핑은 ‘소유’나 ‘구매’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행위인 것이다. 베키에게 일보다 쇼핑이 더 중요한 것도, 남성 ‘쇼퍼홀릭’들이 크게 늘고 있는 것도 이들이 쇼핑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레베카와 똑같다”는 남성패션지 GQ의 이충걸 편집장은 “결국 뭔가를 찾을 거란 희망의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6%, 미국인의 2~8%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문제적’ 쇼핑 인구 중 상당수는 레베카 스타일의 ‘쇼퍼홀릭’이라는 추산이 가능하다.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불행하게도 현대 산업사회는 ‘쇼퍼홀릭’에 의해 눈부시게 존재한다. ‘쇼퍼홀릭’들이 도덕적 비난은커녕 기꺼이 우리 시대 주류 문화의 주인공으로 인정받게 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주간동아 2005.07.26 495호 (p38~40)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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