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3

2005.07.12

“기름값 폭등은 부시 탓”

미국-중동 불안정 정치상황이 첫째 요인 … 美·中 소비 급증, 산유국 공급 조절도 한몫

  • 이준범/ 한국석유공사 석유정보처 조사연구팀장

    입력2005-07-07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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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유가가 강세를 보이기 시작한 지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지난해 1월부터 시작된 국제유가 상승세는 당초 일시적 현상일 것이란 시각도 있었으나, 예상과 달리 연일 최고 가격을 경신하더니 급기야 6월27일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가격이 배럴당 60달러를 넘어서 큰 충격을 주었다.

    ‘배럴당 60달러’는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전까지 국제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11개 산유국이 결성한 국제조직)가 2000년 3월 도입한 ‘유가밴드제’라는 제도를 통해 배럴당 25~30달러 선에서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OPEC는 2004년 12월 유가가 30달러를 돌파했는데도 이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고, 일부에서 밴드를 상향조정해 가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으나 역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올 1월 OPEC 총회에선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밴드제를 포기한다는 결정까지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는 가격 안정을 위한 제도적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OPEC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린 데는 정치적 요인이 크다. 최근의 배럴당 60달러 돌파 사건 또한 이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석유시장의 불확실성 증가가 주원인이었다.

    수급과 정치의 상관관계

    미국과 중동 산유국 간의 관계는 국제유가 안정의 가장 중요한 변수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전을 확보한 1930년대 이래 안정적 석유공급을 위해 중동과의 관계에 역점을 둬왔다. 문제는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중동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졌으며, 이것이 국제유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은 사우디·쿠웨이트 같은 중동 주요 산유국을 중심으로 이른바 ‘석유공급 안보’를 확보하려 했다. 미국은 군사력을 제공해 이라크·이란 등과 같은 강경 아랍국가로부터 산유국을 보호하고, 산유국들은 원활한 석유 공급을 보장한다는 이른바 ‘석유-안보 교환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미국은 이를 위해 이란과 이라크를 봉쇄하는 ‘이원봉쇄 정책’을 구사했다. 그 대가로 당시 미국 국무부 중근동 담당 마틴 인다이크 국장은 중동 산유국들에 배럴당 23~25달러 수준으로 국제유가를 안정시켜줄 것을 공개 희망하기도 했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90년대 초반 국제유가는 25달러 수준에서 안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정책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부시 행정부는 전임 행정부의 이원봉쇄 정책이 잠재적 국제유가 불안요인인 이란과 이라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이런 와중에 발생한 9·11테러는 미국이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에 적극 나서도록 하는 전환점이 됐다.

    미국은 9·11테러의 배후로 이라크를 지목하고, 후세인 정권 붕괴를 위한 군사작전을 벌였다. 당시 이 같은 미국의 결정은 석유공급 측면에서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됐다. 이라크는 세계 3위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생산능력 부족으로 90년 걸프전 이후 UN이 석유수출 금수 조치를 통해 제한한 정도의 원유만을 산발적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 성공으로 후세인 정권이 퇴진하고 외국 기업들이 석유산업에 투자를 시작하면 이라크는 하루 5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란 결론이었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정반대다. 이라크는 현재 준내전 상태에 있으며, 당연히 외국 기업 투자를 통한 증산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심지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생산능력 250만 배럴조차 공장 수리용 부품을 제때 공급 못해 70%만 가동하고 있는 형편이다.

    소비는 늘고 공급은 한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 또한 썩 원만한 편은 아니다. 사우디는 미국이 중동 석유 정책에서 가장 중시해온 나라다. 미국은 9·11테러 배후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과 테러 가담 인물들이 사우디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 테러와 관련 있는 세력을 척결할 것을 사우디에 요구했다. 그러나 사우디는 미국의 요구를 적극 들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부 왕자들은 테러 세력을 비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연히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불편해졌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현재 사우디는 미국이 요구하는 생산능력 200만 배럴 증대에 소극적이다. 사우디에는 80여개의 유전이 있지만, 실제 원유를 생산하는 곳은 1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 사우디가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우디는 미국이 요구하는 200만 배럴 생산 확대 시설을 2009년, 즉 미국의 다음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이후에나 완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부시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국제유가의 충격적 상승에는 국제경제적 영향도 있다. 소비국의 수요 증가가 그 핵심이다. 2002년까지만 해도 세계 석유소비는 7800만 배럴로 전년에 비해 60만 배럴, 단 0.8%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2003년에는 180만 배럴, 2004년에는 270만 배럴로 급격히 늘어났다. 올해에도 최소 180만 배럴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석유 수요 급증을 주도하는 것은 미국과 중국이다. 세계 석유소비 중 60%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발생한다. 그중 유럽 각국과 일본은 석유소비 증가가 거의 없는 반면, 하루 2050만 배럴을 소비하는 세계 최대 석유소비국 미국의 경우에는 2003년부터 매년 40만~50만 배럴씩 소비가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중국 또한 석유 소비가 2003년에는 60만 배럴, 지난해에는 80만 배럴이나 늘었다. 이 두 나라의 석유소비 증가가 세계 증가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석유소비 급증은 제한된 공급 물량을 두고 상호 경쟁하는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유가 행진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2004년 여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영국의 ‘제인 인텔리전스’지는 ‘미국과 중국이 경질원유를 확보하기 위해 대서양 연안 원유시장을 중심으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중국의 정유공장들은 자국 내 원유인 대경원유에 맞춰 설계된 것이다. 대경원유는 휘발유와 같은 고급 석유제품을 많이 생산하는 고품질 경질원유다. 그러나 석유소비 급증에 비해 대경원유의 생산은 늘지 않아 결국 중국은 해외시장에서 이런 고급 원유를 조달해야 하는 형편에 처하게 된 것이다. 해외 석유시장 중 경질원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은 서부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 지역이다. 이곳의 원유는 대서양 연안 시장에서 주로 거래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미국 측 경질원유 구매자들과의 경쟁을 불러왔다. 이 경쟁이 가격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급증하는 석유 수요에 비해 산유국이 보유하는 생산능력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산유국들은 생산능력을 최대한 가동시켜왔다. 효율적 생산관리를 위해 생산시설을 놀리지 않는 것이다. 반면 OPEC 국가들은 가동되지 않는 생산능력, 이른바 잉여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즉 비OPEC 국가들이 원유시장 수요에 맞춰 생산함으로써 잉여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는 반면, OPEC 국가들은 잉여 생산능력을 보유해 일부 산유국에서 석유생산 중단이 발생하거나 수요가 갑자기 증가할 경우 이를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국 이익 위해 산유량 조절 의혹

    고유가가 시작되기 직전인 2003년 12월 기준으로 OPEC 국가들은 총 3150만 배럴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중 가동하지 않고 있는 잉여 생산능력은 260만 배럴 정도였으나, 30일 내에 가동할 수 있는 실질적 잉여 생산능력은 176만 배럴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체 생산능력의 5%에 그치는 것으로 심리적 안정선인 10%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이렇게 OPEC의 잉여 생산능력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심리가 확산되면서 국제유가는 걷잡을 수 없이 상승했다.

    이런 상황 아래 지금 OPEC 산유국들은 자국 이익을 위해 산유량을 조절하고 있다는 의심마저 받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경질원유 확보를 위한 주요 석유소비국의 경쟁이 2004년 유가 강세의 원인이었다. 그 결과 2004년 여름, 경질원유와 중질원유의 가격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대표적 경질원유인 WTI와 대표적 중질원유인 두바이유의 가격차는 고유가가 시작되기 전에는 2~3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질원유 값이 급상승하면서 2004년 10월에는 가격차가 평균 15달러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이 차이가 6월 평균 5달러로 다시 축소된 것이다. 이는 중질원유를 주로 생산하는 중동의 OPEC 산유국들이 원유 판매 수입 극대화를 위해 그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대폭 상승시켰음을 의미한다.

    국제 정치·경제 상황이 이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는 만큼, 유가 강세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석유 수급과 같은 경제적 문제들이 해소된다 해서 유가가 하락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더 근본적인 원인, 즉 미국과 중동 산유국 간의 정치적 갈등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 석유기업 경영자이자 상속자인 부시 대통령. “석유 문제만큼은 자신 있다”고 큰소리쳐온 그가 원유값 상승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점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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