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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뉴욕 도심 ‘붉은꼬리매’ 대소동

아파트 주민들 위생 문제 삼아 매 둥지 없앤 게 발단 … 언론 대서특필 ·시민들 연일 시위

  • 뉴욕=홍권희 동아일보 특파원 konihong@donga.com

뉴욕 도심 ‘붉은꼬리매’ 대소동

뉴욕 도심 ‘붉은꼬리매’ 대소동

둥지를 틀 나뭇가지를 나르는 페일 메일.

상당수 뉴요커들에게 낯익은 이력서가 한 장 있다.

‘이름: 페일 메일(Pale Male). 나이: 약 13세. 주소: 맨해튼 핍스 애버뉴(5번가) 927번지 12층 또는 센트럴파크. 가족: 현재 아내 롤라(약 6세).’

페일 메일은 뉴욕에서 유명인사다. 그가 언제 일어나서 활동을 시작하는지 거의 날마다 지켜보고 기록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는 눈길한번 제대로 준 적 없지만, 그를 한번 보려고 해가 뜨기도 전에 아파트 앞을 찾는 사람도 있고 망원경, 카메라 등을 들이대는 사람도 많다.

페일 메일은 사람이 아니라 수컷 붉은꼬리매다. 희부연 깃털을 가졌다고 해서 ‘색깔이 엷다’는 의미의 ‘pale’이란 이름이 붙었다. 평화롭기만 한 센트럴파크를 굽어보는 고급아파트 12층 처마 장식에 둥지를 치고 산다. 벌써 11년째다. 크기는 가로 2.4m, 세로 0.9m다. 페일 메일은 2001년 만난 암컷 롤라와 함께 새끼들을 키워 새끼들이 스스로 날 수 있을 때까지 둥지를 지키고, 나머지 기간엔 센트럴파크에서 산다.

그런데 얼마 전 큰 소동이 벌어졌다. 12월7일 아파트 일꾼들이 페일 메일의 둥지를 없애버렸다. 둥지가 바람에 날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구실을 하던 쇠못도 뽑아버렸다. 그동안 주민들은 “매 때문에 아파트 주변이 너무 지저분하다”며 불평해왔다. 페일 메일이 비둘기나 쥐 등을 잡아 둥지에서 새끼들과 나눠먹고 찌꺼기를 아파트 입구에 내버리는 데다 똥이 둥지 주변에 묻어 있기 때문.



뉴욕 도심 ‘붉은꼬리매’ 대소동

고급아파트 12층 처마 장식에 있는 페일 메일의 둥지.

11년째 아파트 12층 처마살이 ‘뉴욕 고참’

뉴욕 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뉴스가 지구촌 곳곳에 전해졌다. 당장 시위대가 들이닥쳐 아파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페일 메일의 집을 돌려줘라.” 한 자연보호단체 간부는 “아파트 주민들의 행위는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들 가슴을 찢어놓은 일”이라고 외쳤다.

맨해튼에 사는 비디오 기술자 링컨 카림(43)은 페일 메일의 모습을 날마다 비디오에 기록하는 페일 메일의 최고 후견자다. 그는 페일메일닷컴(www.palemale.com)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카림은 아파트 주민들의 결정에 흥분해 시위에 참여했다. 때마침 주민 중 한 사람인 CNN의 유명 여성앵커 폴라 잔이 두 아들과 함께 외출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들을 뒤따라가면서 소리 질렀다. “이 나쁜 사람들아. 둥지를 제자리에 갖다놓아라.” 폴라 잔의 남편 리처드 코헨은 페일 메일의 둥지를 없애도록 결정한 아파트 주민대표회의 회장이다. 사복형사에게 체포된 카림은 “아이들을 쫓아간 것은 잘못이다”고 사과했고, 법원으로부터 ‘폴라 잔 가족에게 300m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뉴욕 도심 ‘붉은꼬리매’ 대소동

뉴욕 센트럴파크 인근에 위치한 페일 메일이 사는 아파트 .

유명인사가 등장한 이 소동으로 언론과 시민들의 더 큰 관심을 끌게 된 페일 메일과 그 가족들은 집을 잃고 며칠째 센트럴파크를 배회해왔다. 자연보호단체들이 소송을 제기한 끝에 뉴욕시와 자연보호단체, 그리고 아파트 대표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을 열었다. 아파트 측의 제안은 15층인 아파트 지붕에 대(臺)를 설치하고 그곳에 멋진 둥지를 마련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무려 10만 달러(약 1억500만원)를 들여서. 그러나 자연보호단체는 이를 거부하고 원상복구를 요구했다. 결국 이들은 페일 메일의 둥지를 원상복구하되 그 아래에 대를 설치해 분비물 등이 아파트 현관 앞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로 합의했다.

페일 메일의 열성팬들은 아파트 앞에서 16일동안 시위를 벌였다. 매일 오후 4시 반부터 7시 반까지, 5번 애버뉴와 74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서 퇴근하는 아파트 주민들을 상대로 말이다. 23일 둥지는 마침내 다시 설치됐다. 이날 오후 4시반, 페일 메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시 아파트 앞에 모였다. 축하와 감사를 위한 시위였다. 30여명의 시민들이 모이자 뉴욕의 자연보호단체인 오두본의 EJ 맥아담스 사무총장이 경과보고를 했고,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러나 카림은 둥지가 제자리에 다시 설치되더라도 페일 메일 가족들이 둥지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살아갈지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둥지가 사라진 직후 센트럴파크에서는 페일 메일의 가족은 아니지만 한 마리의 붉은꼬리매가 죽은 채로 발견돼 페일 메일 팬들을 경악하게 했다.

페일 메일이 뉴요커들의 눈에 띈 것은 1993년. 평소처럼 센트럴파크의 한 벤치에 혼자 앉아 점심식사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프레데릭 릴리엔(당시 27세)의 눈에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비둘기 한 마리를 꽉 붙잡고 있던 붉은꼬리매가 그의 머리 위쪽의 나무에 앉아 있었다. 매를 지켜보다 어느 순간 릴리엔의 머리에 화려한 계획이 스쳐 지나갔다. “저 새의 이야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는데 얼마 후 그 매가 아파트 12층 처마 장식에 둥지를 짓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지요.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벨기에 출신으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고 뉴욕을 찾은 릴리엔은 곧바로 카메라를 메고 매를 따라다녔다. 그 매가 바로 페일 메일이다. 건강이 나빴던 릴리엔은 96년부터 본격적으로 페일 메일의 일생을 비디오카메라로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후 건강을 되찾았다. 그래서 그는 “그 기록은 어쩌면 내가 둥지에서 나는 기록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건강 때문에 세상을 겁냈던 그가 둥지에서 뛰어내리기를 겁내는 새끼 매들에게 애정의 눈길을 주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그 기록을 ‘새가 인간들에게 전해주는 러브 스토리’라고 불렀다.

뉴욕 도심 ‘붉은꼬리매’ 대소동

페일 메일에 반해 여생을 자연공부 하면서 보냈던 고(故) 찰스 케네디씨.

아파트 주민들, 결국 둥지 원상복구 약속

릴리엔은 쌍안경을 목에 걸고 한 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페일 메일을 따라다녔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되는 관찰과 촬영은 혼자 하기 벅찬 업무였다. 때로는 파파라치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아파트 12층에 둥지를 튼 페일 메일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가져 여러 방송사들이 현장에 왔다 떠났지만 릴리엔은 지금도 현장을 지키고 있다.

릴리엔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페일 메일’은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와 영화채널 HBO를 통해 방영됐다. 페일 메일의 부성애(父性愛)와 그의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페일 메일을 향한 사랑을 표현한 영화다. 하늘 높이 매달린 둥지에서 첫 날갯짓을 두려워하는 새끼 매들이 몇 차례의 위험한 시도 끝에 스스로 날아오르는 모습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자연이 우리 모두에게 준 선물’이란 부제가 붙은 이 영화는 많은 시청자의 가슴에 페일 메일의 존재를 깊이 심어놓았다. 영화는 국제야생동물영화제에서 5개 부문의 상을 받은 것을 포함해 그동안 많은 상을 탔다.

뉴욕 도심 ‘붉은꼬리매’ 대소동

페일 메일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프레데릭 릴리엔과 뉴욕 자연보호단체 오두본의 EJ 맥아담스 사무총장이 2004년 12월23일 마지막 시위현장에서 만났다.

이 영화에 앞서 페일 메일의 존재를 뉴요커들에게 널리 알린 것은 ‘사랑에 빠진 붉은꼬리매’라는 책이었다. 새를 무척 좋아하는 작가 겸 언론인인 마리 윈이 센트럴파크에 사는 새들과 새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헌신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페일 메일을 날마다 비디오에 담는 릴리엔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윈은 웹사이트(www.mariewinn.com)에서 페일 메일의 둥지를 둘러싼 ‘투쟁’과 페일 메일의 일생에 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재닛 헤스는 윈이 펴낸 책에서 릴리엔의 헌신적인 매 사랑 이야기를 읽고 감동해 그를 찾아나섰다. 릴리엔한테서 페일 메일의 생활에 관해 자세히 들은 헤스 역시 페일 메일의 팬이 되었고 릴리엔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극본을 담당했다.

페일 메일에 반해 여생을 자연공부를 하면서 살았던 찰스 케네디(2004년 67세로 사망)도 책과 영화에 모두 소개돼 있다. 뜻하지 않게 친척의 유산을 상속받아 은퇴생활을 하던 케네디는 매일 센트럴파크를 찾아 땅으로 기어오르는 매미 애벌레, 집을 짓는 거미, 나무에 앉아 쉬고 있는 부엉이 등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다 페일 메일을 알게 됐고 릴리엔 등과 함께 페일 메일을 관찰하는 일에서 기쁨을 찾았다.

페일 메일의 열성 팬들은 페일 메일의 생활을 모두 관찰하고 있다. 페일 메일이 짝을 지은 암컷들을 ‘첫사랑’ ‘초콜릿’ ‘블루’ ‘롤라’ 등으로 이름붙여 놓고 그동안 26개의 알을 낳아 23마리의 새끼가 태어난 것을 모두 기록해놓았다. 깃털 달린 새끼들이 둥지에서 처음 날기 시작한 시간을 분 단위까지 확인해놓았다. 페일 메일과 그 가족들을 자기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뉴요커들. 이들은 “인간이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페일 메일이 가르쳐주었다”며 고마워한다.



주간동아 2005.01.04 467호 (p50~51)

뉴욕=홍권희 동아일보 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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